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반항

by Plato Won
Plato Won 作,파란 하늘을 붉은색으로 덧칠햐는 빈항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알베르 카뮈의 사유 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문장이 떠오른다.

그의 소설에는 실존주의 철학사상이 찐하게 묻어있다.


무엇에 대한 반항인가?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다.

'세상의 부조리'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아는 그런 부조리는 아니다.


삶이 특별한 의미가 없는데

삶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강요하는 세상이 부조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의 부조리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카뮈의 반항'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굳이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특별히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특별히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의미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이 삶에 의미를 부여

하는 것에 굳이 목매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자유를 얻는다.


삶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역설적으로 허무주의가 오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카뮈의 사유다.


살아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면

죽어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없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집착할 이유도 없으니 괴로워할 이유도

없다. 자연스럽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이 시키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면 된다.

드디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카뮈의 반항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세상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곳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무심으로 사는 것,

그것이 카뮈의 반항이다.


새가 날기 위해 몸집을 점점 가벼이 하듯,

삶의 부조리가 점점 없어지면 자유를 얻는다.


카뮈의 사유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삶의 능동주의다.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인 것이다.


"엄마는 오늘 죽었다.

어쩌면 어제 인지도 모른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구절이다.


삶의 영역에서 죽음을 격정 없이 받아들

있다면 특별히 연연할 것들이 있겠는가.


자유로운 삶은 연연하지 않을 때 실현된다.

삶의 의미를 부정할 때 비로소 삶의 의미가

되살아 난다.


46세의 젊은 나이에 전철을 타고 가려다

친구의 권유로 친구가 몰던 차를 타고 가다

차가 나무룰 들이박는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카뮈,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란 말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개인의 자유를 깊이

파고드는 동시에 허무주의 철학 반대하는데 헌신했다고 스스로 말했던 카뮈.


1957년 43세의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뮈,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되지만,

정작 그는 그러한 평가를 거부한다.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카뮈의 반항이다.


반항하는 인간만이 진짜 의미를 갖고 살아갈 수 있다.

이유는 부조리하다는 현실을 무시하거나 회피

하지 않고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삶이 무의미함을 알기에,

의미를 찾지 못하더라도 거기에 다시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자유이고, 이런 자유는 선순환된다.

우리의 자유가 사는 동안 계속 이어지게 되는 원리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반항을 지속할 때

우리는 장자의 소요유 편에 나오는 물고기 곤이

대붕이 되어 하늘을 날아올라 구만 리를 단번에

날아다니듯, 거닐 소, 놀 유, 인생을 거닐며 놀듯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카뮈의 반항이란 삶의 부조리를 비웃고 현재 삶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의 부조리가 도망가든, 배 아파 죽든 나의 내면에서 없어게 된다.


드디어 끈질긴 폭염이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온다.


파란 하늘을 붉은색으로

덧칠하는 단풍나무 가지는

자연의 순리에 대한 카뮈의

귀여운 반항이다.




Plato Won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