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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Aug 23. 2024

3-4. 무의미

다시 정신이 든 것은 K가 다시 전화를 걸어온 시점이었다. 통화를 종료한 지 5~10분 정도 됐을까. 오랜만에 연락했다가 내가 눈물을 겨우 참는 소리를 들으면서 꽤 당황한 것 같았던 K 역시 나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K는 최대한 침착하게 사촌 매제가 Q병원 신경과에 재직 중이라고 했다. 절박했던 나는 직함이나 직장에 대학 병원과 신경과가 동시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일말의 안도감마저 들었다. 물론, K의 사촌 매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제시받은 상황은 아니었고, 내가 전달해 준 진료의뢰서와 의료 기록을 살펴보는 중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연락한 형의 무례한 전화를 받고도 나 대신에 침착을 유지하며 사태 해결을 위해서 알아봐 주는 K에게 무척 고마웠다.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들은 채 전화를 끊었다.


이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V병원의 응급진료센터로 향했다. 응급실을 통하는 보호자의 전원 요청은 무모하고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 순간 Z병원을 연결해 줬던 삼촌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머쓱함도 해소하고 전원 취소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을 친구의 조카 놈을 위로해 주기 전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원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서운하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본인이 경험한 환자들의 경과와 예후를 굳이 설명하면서 나를 위로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경험 공유뿐만 아니라 정보 전달의 목적이 짙었던 이 통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창한 의학 용어와 치료법에 대한 설명의 파도가 지나가고 나면 나는 가만히 있다가 알겠다고 대답하는 것의 연속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친절은 내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화에 있어서 화자도 중요하지만, 청자도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가 대화하는 양상은 탁구나 테니스의 랠리처럼 공격하는 자와 수비하는 자의 역할이 수없이 바뀌면서 서로에게 공을 상대방에게 보내는 것과 흡사하다. 굳이 구석으로 받기 힘든 공만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달려가서 받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이 받기 편하게 가운데로 보내주기 위해 열심히 뛰는 사람들이 있다. 대화할 때, 내가 하는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결국 상대방의 성향을 빠르게 파악해서 상대방이 듣길 원하는 을 하는 것이 결국 길고 건강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렇게 해야만 일방적인 발화의 교환이 아닌 진정한 소통이 될 수 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만 얘기하면 상대방과의 대화가 아닌 내 마음의 배설밖에 되지 않는다.


대화를 진행할 때 상대방의 성향을 파악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지나친 배려 또는 오지랖으로 느껴질 수 있.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남들과 하는 대화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해서 생기는 우려다. 다른 사람 두 명 이상이 상호 간의 의견 교환, 일상 공유 하면서 서로 동일한 생각과 의견을 갖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다. 협상, 회의와 같이 목적성이 짙은 의견 교환의 자리를 제외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대부분의 대화는 이런 일상적인 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아쉽게도 상대방이 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경청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그런 점을 인정하고 껄끄럽지 않은 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부드러운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다. 고통스럽게 남의 이야기를 반박 없이 듣고 있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관계의 권력에 짓눌린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11분 26초 간의 긴 통화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V병원 응급진료센터에 무모한 도전을 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미세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거기에 희망을 걸면서 큰 비닐 막으로 전면 차단된 응급진료센터 입구에 있는 간이 접수센터에 조심스레 접근했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비닐로 된 초소임에도 불구하고 노크하는 시늉을 했다. 보초처럼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의료진 한 명이 마스크, 방진복 등의 완전 무장을 한 채로 나를 맞이해 줬고, 내 사정을 듣더니 응급실 안에 있던 사람을 호출했다. 누군가 안에서 문을 열더니 동일한 복장을 한 사람이 두 명 나왔고, 그중에서 윗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내 사정을 다시 설명했다.


내가 두 번째로 설명한 아내의 상황을 들은 응급실 직원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내게 채근하듯 일반론을 장황하게 설명해 줬다. 골자는 병원끼리 합의가 돼야 하는데 보호자가 이렇게 서류만 딸랑 들고 오면 안 되니, 다시 병원으로 가서 의사한테 전원 요청을 해달라고 하라는 것이다. 내가 더 해볼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인가 절망하며 돌아서려고 하는데, 그는 제 발 저린다는 듯 한 마디 덧붙였다.


“응급실은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니, 병원끼리 합의가 되면 전원 할 수 있어요. 돌아가서 의사한테 저희 쪽에 연락하라고 하세요.”


본인들은 정상적으로 응급실을 운영하고 있고, 아내를 안 받아준다고 한 적은 없으니 어디 가서 안 받아줬다고 하지 말라는 말로 들렸다. 이 사람도 결국 내 책임으로 돌리는 것 같았다. V병원에서 안 받아준 게 아니고, 내가 절차를 안 지켰다는 확인 사살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병원들 간에 별도의 협의 없이 막무가내로 응급실에 아내를 들이밀려고 한 것은 물론 기본 절차를 무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 뒤통수에 대놓고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 같아 퍽 불쾌했다.


담당의가 어제부터 계속 전원 요청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어디로 연락을 시도했는지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갑갑했다. 내가 가봤던 V병원에 연락을 해봤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병원들에 전원 요청을 한 것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M병원으로 돌아가서 기회가 되면 물어보기로 다짐했다. 이제는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없었다.


V병원에서 간단하게 퇴짜를 맞은 나는 호기롭게 집을 나왔으나 갈 곳을 잃은 가출 청소년처럼 길 위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1시가 돼서 점심은 먹어야겠다 싶어 학창 시절에 자주 거닐었던 거리로 향했다. 슬슬 걸어가던 중 장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내의 고등학교 동창인 N의 남동생이 의전인가 의대를 갔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났던 모양이다. 나도 그때 아내의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나서 얼른 전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N의 남동생은 군의관으로 있어서 도움을 받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진료의뢰서를 공유하며 아내의 친구들에게 현재 상황의 공유를 부탁했다. 도움의 손길은 어디서 올지 모를 일이다.


나는 거닐던 거리에 있던 타코벨에 자연스레 들어갔고 눈에 보이는 아무 메뉴나 주문했다. 앉아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지인들과 연락을 계속했다. K는 사촌 매제가 보내준 문자를 공유해 줬는데 결론적으로, 전원으로 연결되는 도움을 주기 어렵다고 했다. 우선 Q병원에 외래 예약이라도 걸어 놓으라고 당부했다. K와의 전화를 끊고 Q병원에 연락을 해봤더니,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예약 담당 상담원과 통화 연결이 됐다.


상담원은 매우 딱딱하게 전화를 받았는데, 나의 절박한 상황을 전혀 공감해 주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했다. 물론, 상담원들은 직업 자체가 예약 접수를 안내하는 것이지 친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됐다. 그렇지만 친절해야 하는 것이 직업이 아니라고 해서 꼭 불친절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상담사는 환자가 의식이 아예 없는 경우의 준비물까지 굳이 열거해 줬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굳이 상기시켜 줘서 머릿속으로 그 준비물들은 전혀 입력되지 않았다. 환자의 건강을 가장 걱정하고 있는 보호자가 전화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호자가 생각도 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까지 안내를 해주는 것이 너무나 서글프고 화가 났다. 얼핏 들으면 꼭 환자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기를 기대하는 사람 같아 보여 상당히 얄미웠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절대로 필요한 안내인 것은 맞지만, 고작 몇 달 뒤의 외래 예약을 잡아주면서 굳이 그런 안내까지 해주는 것이 한편으로 얄밉기까지 했다. 보호자를 조금이라도 고려해 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한껏 들었지만, 나는 일단 외래 진료 예약이 필요한 입장이라 꾹 참기로 했다. 당장 아쉬운 쪽은 우리였기에 꾹 참아야 하는 것도 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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