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식사를 후다닥 마친 뒤에 나는 또 갈 길을 잃었다. 다시 전원이 가능한 병원을 연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를 지인들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너무 자주 말해서 외워버린 아내의 상황 설명 레퍼토리를 읊어댔고 돌아오는 답변은 대부분 비슷했다. 직접 아는 사람은 없으나 한 번 알아봐 줄 테니 조금만 정신 차리고 기다려봐라. 역시나 이런 시국에 전원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I에게 전화가 다시 와서 약간의 기대를 하고 전화를 받아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돌아오는 답변은 다르지 않았다. 지인들에게 물어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보자는 것이다. I가 언급한 지인 중에는 A도 있었다. 이왕 알게 됐다고 하니 마음 편히 연락해 봐도 되겠다 싶어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웬일인지 A는 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평소의 A라면 이미 눈물 콧물 범벅이 됐을 텐데, 무슨 일이냐며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내가 I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A의 조용했던 주말은 나의 일방적이고 무자비한 비보 전달로 망가졌다. 오히려 이미 상황을 전달받은 것으로 착각한 탓에 A는 제대로 된 인사도 하기 전에 뺨 맞은 사람처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그녀는 금세 눈물범벅이 되어가고 있었고, 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상세하게 상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와중에도 내 이야기를 듣고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W병원 신경과 교수에게 연락해 보겠다고 했다.
아내의 친한 친구인 B한테도 연락이 왔다. N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하면서 언니의 친구가 V병원 분원 신경과에 재직 중이라고 했다. 하필이면 파업으로 인해 일손이 부족해서 방금까지 당직 근무를 하고 휴식에 들어가서 바로 연락이 닿지 않아 조금 기다려봐야 한다고 했다.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이 나타난 것 같아 반가우면서도 당장 연락이 안 된다고 하니 답답함도 늘어갔다. 가족들이 의사나 간호사로 재직 중인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했던 O, P에게도 연락을 취해 봤는데, 결과는 동일했다. 도움을 받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본인들도 아는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와 아내의 일을 항상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는 D도 대학 병원에 재직했던 지인과 연락하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평온한 주말에 나로 인해 불편한 연락을 취해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결국, 수많은 사람에게 아내의 자가면역뇌염에 대해서 전단지를 뿌리는 사람처럼 잔뜩 전파만 하고 V병원에서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나는 M병원으로 돌아가는 택시에 터덜터덜 몸을 실었다. 무기력함과 피로함에 잠시라도 쉬고 싶었다. 하지만 뿌려놓은 씨앗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지인으로부터 전화, 문자, 카톡 등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쯤 되니, xx 병원 신경과에 아는 교수가 있는데, 한 번 물어봐 주겠다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전원을 해주겠다는 의사를 연결해 주는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파업 전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현재의 시국에서 응급 환자가 응급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주말 오후라는 점이 전원 가능성을 더욱 희박하게 만들고 있었고, 끝없는 연락에 지쳐가고 있을 즈음에 M병원 중환자실에서 전화가 왔다.
담당의의 전화였다면 전원의 기대를 조금이라도 했겠지만, 중환자실에서 연락을 준 것은 괜히 실망스러웠다. 오히려 나를 굳이 타 대학 병원 응급실로 보낸 것이 나를 쫓아내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나 싶은 의심마저 들었다. 그래도 아내의 상태에 대한 업데이트도 들어야 했기에 최대한 친절하게 받고자 노력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린 이야기는 다소 의외의 소식이었다.
“보호자님. 어디세요? G병원에서 전원을 받아준다고 해서요. 오시는데 얼마 정도 걸리세요?”
놀란 나는 정신 차리고 힘차게 대답했다.
“10분 후면 도착합니다. 금방 갈게요.”
헛걸음했던 나는 다행히도 수확 없이 병원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내가 직접 거둔 수확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사실 수확물도 내가 거둔 게 아니라 병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사실상 내가 한 일은 전혀 없었다. 내가 아침부터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였는데도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무의미한 행동만 했다. 그래도 아내가 전원해야 했기에 그런 무기력함과 무력감에 대해서 속상해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며칠간 유사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그저 세상이 있어 주길 원하는 자리에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병원에 도착해서 부리나케 중환자실로 달려간 나는 중환자실의 벨을 눌렀고, 아내의 담당 간호사가 나를 맞이하러 나왔다. 간호사 어깨너머로 중환자실 내부를 힐끔 보니 간호사들은 부지런히 아내의 전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욕심 같아서는 소위 말하는 서울의 빅 5 대학 병원에 보내고 싶었으나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집과 직장에서도 그렇게 멀지 않아서 다니기에 나쁘지 않았고, G병원은 파업 중인 전공의들이 아닌 전문의로만 구성된 병원이라서 의료진 파업의 직접적인 영향은 크지 않다고 설명해 줘서 조금 더 안심할 수 있었다. G병원은 새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2차 병원이지만, 해당 병원의 본원과 같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아내가 필요로 하는 대응들이 가능하고, 최근에 지어져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기대해 볼 수 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에서는 비교적 괜찮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중환자실의 간호사들이 바쁘게 아내의 전원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원무과에 가서 수납을 하고 지금까지의 의료 기록을 추가로 발급하러 내려갔다. 생각보다 많이 나온 병원비에 놀라지 않은 척을 하며 겉으로는 자신 있게 일시불로 결제했다. 의료 기록을 들고 중환자실로 뛰어 올라가니 아내의 전원 준비는 거의 마무리되어 있었다. 오늘 거의 처음으로 아내의 상태를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육안으로 봤을 때는 어제보다는 덜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워낙 정신없이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탓에 다행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아내의 상태를 확인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간호사들이 불러준 사설 구급차 기사가 도착했다. 특별한 인수인계 없이 기사와 나는 아내의 침상을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간호사들은 치료 잘 받으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우리를 보내줬다. 후련해 보이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내가 너무 괴롭혔다는 미안한 마음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1층에 대기하고 있던 사설 구급차에 아내와 함께 탑승했다. 그저께 아내와 탔던 구급차보다는 허술하고 구식으로 보여서 살짝 염려스러웠지만, 구급차 기사는 간단한 잠금장치들로 아내가 누워있는 들것을 나름대로 고정한 이후에 G병원으로 출발했다. 면허제로 운영되는 사설 구급차 같았다. 티맵으로 확인했을 때, G병원까지 30분 정도 걸린다고 나왔다. 아내가 그동안 잘 버텨주길 바라고 있던 순간 구급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모든 차량과 신호들을 가볍게 우회하면서 거의 한 번도 멈추지 않았고 기존 운행 예정 시간의 절반 수준인 15분 만에 G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서 모세의 기적을 보는 것은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우리 앞에서 양보해 준 차들에 정말 감사해하며 다음에 내가 운전할 때 주위에 구급차가 있으면 어떻게든 비켜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운전할 때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면 진짜로 환자를 태우고 있는 것인가 의심했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구급차 안에서 이틀 만에 아내와 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내는 정상적인 대화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어제보다 부쩍 말이 어눌해지고 안면마비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 마음을 들키면 아내가 더 불안해할까 봐 겉으로 태연한 척하며 아내를 다독였다. 간헐적인 경련과 발작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고, 사설 구급차의 단단하지 못한 잠금장치로 인해서 아내가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 같아 들키지 않게 옆에서 아내를 지탱하고 있었다. 아내의 말은 점점 알아듣기 힘들어지고 있었고, 귀를 가까이 대고 유심히 들어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전달력을 갖게 되었다. 나는 곧 도착할 테니 조금만 버티자고, 금방 괜찮아질 거라는 지킬 수 없는 약속만 연신 내뱉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아내는 한마디 한마디 하는 게 무척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도착하기 얼마 전에 뱉었던 말은 특별히 귀 기울이지 않아도 또렷하게 들렸다.
“우리 딸 안아주고 싶다.”
아내와 딸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걱정할 겨를도 없이 G병원의 응급진료센터로 진입했다. 나는 부랴부랴 응급실에 접수하러 들어갔고, 구급차 기사는 아내가 누운 침상을 응급실 안으로 이동시켰다.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해 주는 응급실 의사는 제법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파업의 영향인지 무척 예민해 보였다. 우리에게 기본적인 질문이나 형식적인 환영도 생략하고 대뜸 선전포고부터 했다.
“전달받은 게 없으니, 확인이 안 되면 저희 응급실에서는 받아줄 수 없어요.”
정확한 상황 파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불청객 취급을 하기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우선 응급실에 어떻게든 넣어야 하기에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상대방이 아쉬울 것이 있다고 판단했을 때, 마음 편히 화를 내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는 반면, 상대방의 입장과 행동에 따라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지가 결정되는 상황이면 화를 꾹 참고 잘못한 게 없어도 온몸으로 사과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나 역시 화가 나지만 화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게 된 전원인데,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확인해 보고 알려주겠다는 말 대신 협박부터 하는 응급실 의사에게 아내는 여기에 올 자격이 있다고 어떻게든 설득해야만 했다. M병원 중환자실에 전화를 걸어서 응급실 의사가 들을 수 있도록 격앙된 어조로 강하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여기에서는 우리를 받아주지 않겠다고 하는데요?”
일부러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서 우리를 겁박한 그에게 압박감을 주려고 최대한 불쾌한 내색을 보였다. M병원에서는 제대로 찾아간 게 맞냐고 의심하면서 G병원 신경과랑 얘기가 다 됐으니 다시 알아보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이미 종료되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응급실 의사에게 들으라며 나의 불만들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인제야 전화를 끊은 척하며 뒤돌아봤더니 그사이에 신경과와 확인해서 아내가 전원 대상임을 확인한 의사는 아내의 기본적인 검사를 이미 시작했었다. 확인해 보고 알려주겠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처음 본 사이에 쓸데없이 내가 단호하게 굴도록 만든 것은 누구인가. 의사는 아내를 조금 살펴보고 혈압을 재면서 내게서 진료의뢰서와 의료 기록을 전달받았다. 진료의뢰서를 열어보기 전에 내게 병명을 물어봤다.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았던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자가면역뇌염입니다. 뇌염이요.”
그때 불현듯 아내가 짜증을 불쑥 냈다. 안면마비로 인해 말이 매우 어눌해진 상태였지만, 짜증과 화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왜 말을 안 해주는 거야?”
왜 아무도 본인에게 자신의 병명을 얘기해주지 않냐는 불만 섞인 항의였다. 분명히 구급차에서 내가 지금까지 들은 정보들을 간단하게 브리핑해 주면서 진료의뢰서 상의 병명도 얘기해 줬다. 간호사들이 아내에게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던 것인가. 일견 이해는 되는 게 그들로서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굳이 아내에게 전달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얘기해 줬다고 하더라도 아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내의 인지 능력도 완전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