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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Aug 11. 2024

1-2. 사탕은 무슨

아내는 화장실로 몇 발짝 떼더니 이내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우면서 심한 어지럼증과 손발 저림을 호소했다. 평소에도 편두통을 이따금씩 호소하던 아내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전히 해몽 검색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시금 화장실로 가려다 실패한 아내는 균형을 전혀 잡지 못했고, 초점이 맞지 않다고 하며 극심한 손발 저림을 호소했다. 호흡도 굉장히 가쁘게 쉬고 있었다. 후하후하. 생애 마지막 숨을 최대한 만끽하겠다는 사람처럼 있는 힘껏 호흡을 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병원에서는 이 현상 과호흡이라고 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 일단 병원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때까지만 해도 병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는 직선으로 걷지 못하고 갈지자로 겨우 전방을 향해 걷는 정도였다. 학교에서 배운 Random Walk 이론을 사람의 형태로 표현한다면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필이면 의료진 파업이 본격화된 시점이라 대학 병원은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119에 전화해서 우리를 받아줄 수 있는 병원들을 수소문했다. 몇 군데의 병원을 안내받았는데, 코로나 검사를 받으면서 2번 정도 방문한 탓에 이름이 익숙했던 S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차로 갈 때부터 아내는 이미 부축 없이는 걸을 수 없었으며, 의자를 최대한 젖혔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어지러움과 통증을 호소했다. 이때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와이프를 응급실에 넣어주고는 응급실 보호자 대기실에서 NBA를 보면서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실에 접수할 때도, 아내가 과호흡으로 힘들어하자, 응급실에 있던 간호사는 상당히 쌀쌀맞게 응대했다.


“환자분. 호흡은 알아서 조절하셔야 돼요. 저희가 어떻게 해드릴 수가 없어요. 조금만 숨을 조절해서 쉬려고 해 보세요.”.


처음 겪는 증상에 불안해하고 있는 환자와 보호자의 눈은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한테는 업무이고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친절함을 바라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반대인 불친절함과 불쾌함을 내비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친절함과 불친절함, 그 사이 어디선가 우리를 맞아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와이프의 고통과 증상에 대한 걱정보다는 간호사의 태도로부터 기인한 불쾌함이 더 컸다.


응급실에 아내를 인도한 이후에 나는 보호자 대기실에서 NBA 농구 경기를 마음 편히 시청하고 있었다. 아내가 수액도 맞고 각종 검사를 하고 나면 적절한 진료와 치료를 받을 거라 생각했던 터라 아내에 대한 걱정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1시간, 2시간, 3시간이 흘러가는데 응급실이나 아내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처음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응급실에서는 급하게 뇌 CT 검사를 진행했었고, 오후 1시가 다 돼서야 아내를 휠체어에 싣고 왔다. 아내는 이제 고개를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개는 휠체어에 앉아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는 기업인들보다 더 깊게 숙이고 있었고, 두 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컨디션은 당연히 회복되지 않았고, 그나마 누워있을 때 덜 어지럽다고 해서 두 시간 정도 응급실에 더 머물러보았다. 그동안 의료진으로부터 혈액 검사, 뇌 CT 검사에 대한 결과를 들었는데 결론적으로 검사 결과는 깨끗하고 특별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으니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질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의사도 그렇게 얘기했기에, 나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누워있을 거면 응급실보다는 안방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판단하여 부랴부랴 퇴원해서 집으로 향했다. 이때도 아내는 나의 부축 없이는 걸을 수 없었고, 손발의 저림과 고통은 더욱더 깊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도 응급실에서 어지럼증 약도 지어줬으니 약 먹고 좀 자면 괜찮아질거라 애써 믿어보려 했다. 집에 가서 배달시킨 죽 몇 숟갈을 억지로 먹이고 약도 거의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는 침대에 눕혔다.


우리가 응급실로 출발하기 전에 장모님은 아침에 오셔서 손녀딸을 유치원에 등원해 줄 준비를 하는 사이에 우리는 응급실을 다녀왔었다. 장모님은 감사하게 몇 년째 우리 부부가 둘 다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당신 손녀딸의 어린이집, 유치원 등·하원을 우리 엄마와 함께 도맡아서 해주고 있다. 아내가 복직하고 나서부터 계속 도와줬으니, 5년 넘게 이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불안한 날은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고개를 푹 숙이며 병원을 다녀오는 딸과 그 딸을 부축하고 오는 사위를 보는 마음은 어땠을까? 걱정하는 말을 하면 딸이고 사위고 괜찮다고 할 것 같으니 별말하진 않았겠지만, 눈빛에서 순도 100%의 걱정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런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아내를 침대에 눕혔고, 괜스레 장모님이 보고 있었던 TV 프로그램 얘기를 하며 장모님의 시선을 돌리려고 했다.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호출할 테니 걱정 말고 얼른 댁으로 가서 쉬라고 하며 장모님을 귀가시켰다. 장모님은 말 그대로 등 떠밀리며 집을 나섰다. 나는 잠시의 휴식을 취하고는 오후 5시에 하원하는 딸을 데리러 유치원으로 향했다. 아내는 별다른 기척 없이 그저 누워있기만 했다.


나는 아내가 오랫동안 누워서 쉬었으니, 컨디션은 충분히 회복됐을 거라 여겼고, 점심때 먹고 남은 전복죽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면서 저녁 먹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딸은 유치원 하원 이후에 엄마도 아빠도 각자의 이유로 지쳐서 놀아주지 않으니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다. 이제 저녁 먹자며 모두를 식탁으로 불렀고, TV를 끄고 총총 식탁으로 달려오는 딸과는 달리 아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끙끙대며 나오려고 하길래 전방 주시가 되지 않는 아내를 부축해서 식탁에 겨우 앉혔다.


“약 먹으려면 뭐라도 먹어야지. 조금이라도 먹어.”

“......”


아내는 입은 떼지 않고 고개만 죄인 마냥 푹 숙이고 있었다.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있다기보다는 중력의 작용을 받는 두개골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경추가 겨우 붙잡고 있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 숟갈은 들어보라고 했더니 고개는 들지 못하고 오른손으로 겨우 숟가락을 부여잡으며 전복죽 한 숟갈을 입에 갖다 댔다. 고개를 숙일 수 있는 만큼 푹 숙이고 있길래 아직까지도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던 나는 괜히 농담이나 건넸다.


“왜 이렇게 환자 코스프레야. 얼른 밥 먹고 약이나 먹어~”

“......”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내는 이미 자기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의지는 있어서 약 세 알을 하나씩 겨우 위장으로 밀어 넣고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히러 가던 아내는 겨우 삼켰었던 전복죽 두 숟갈과 약 세 알을 모두 바닥에 쏟아내고 화장실로 비틀대며 달려 들어갔다. (딸은 아직까지도 이 광경을 두고 ‘당근토’라고 칭한다. 전복죽에 있던 당근 알갱이를 봤던 모양이다.) 깜짝 놀란 딸과 나는 황급히 아내에게 달려갔고, 나는 사태의 형태는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일이라는 불길함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기특하게도 딸은 나와 함께 물걸레질하며 엄마가 게워낸 토사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아내는 딸이 걸레질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깝고 미안했는지 하지 말라고 말도 했다. 엄마의 힘이란 참.


사태를 수습하고 딸과 허겁지겁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평소에 내리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SOS를 쳤다. 집에서 마음 편히 쉬고 있으라고 진정시켰던 장모님에게 전화했다.


“어머님. 아버님이랑 함께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용건은 짧았고, 대답도 거의 없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5분 대기조 마냥 최대한 신속하게 우리 집에 왔다. 우리는 모두 끙끙대는 아내가 누워있는 침대 주위를 삥 둘러서서 작전회의를 했지만 아무런 작전도 나오지 않았다. 작전 없는 작전회의. 능남전에서 위기를 맞은 북산이 작전타임을 불렀으나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그저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우리 셋은 이미 아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을 테지만 해결 방안은 아무도 제시하지 못했다. 나는 아침에 S병원을 갔으니 이번에는 어떻게든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다른 의견을 받아 봐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표를 낸 전공의들이 반나절 만에 일터로 복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직접 차를 끌고 대학병원 응급실들을 찔러서 뚫어야 하는 상황인데 너무나도 자신이 없었기에 결국 119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직접 구급차를 호출해 봤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나의 전화를 응대해 준 119 대원은 환자 신분증을 준비해 두라고, 곧 구급차가 갈 예정이니 전화를 잘 받으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아내가 아프다는 걸 설명하고 알리게 됐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고, 손발이 너무 아프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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