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태’를 말하는 사람과 ‘방법’을 말하는 사람. 전자가 나쁘고 후자가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와 상황의 진전을 위해서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방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상황 판단은 이미 끝났으며,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대응 방안이 무엇인지, 취할 수 있는 선택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끝난 후 대화에 임한다. 상대방이 문제의식에 공감한다면, 그 대안들 중에서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서 논의하거나 선택하면 된다. 물론 ‘상태’를 말하는 사람들이 상황 파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상황 판단은 하지만 자기의 판단력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다면 내 의견을 말하기 전에 상대방에게 ‘상태’를 읊어줘서 내 판단이 맞는지, 내가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받고 싶어 한다.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객관식으로 묻는 거라고 한다면 ‘상태’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질문받는지도 모르게 ‘3,000자 이내로 서술하시오’의 문항을 던진다. 나는 평소에 대화하면서 ‘상태’의 발화를 하는 것을 최대한 지양한다. 내가 ‘상태’로 얘기하면 할수록 상대방에게 판단을 미루고 내 마음을 맞춰보라는 말장난에 불과한 발언이 될 뿐이다. 오히려 문제의식은 나만 있는데 고민은 대화 상대에게 떠넘기는 것 같아 항상 꺼린다. 물이 마시고 싶은데 “목말라!”라고 하는 상황을 떠올리면 공감이 쉽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목마르다고 하면 그걸 들은 사람은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어렵다고 하면 그때부터 상대방이 말한 이유, 마시고 싶은 음료수 등을 고민해야 한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는데, 목마르다고만 하고 우물은 왜 안 파주냐며 성내는 것 같아 ‘상태’를 얘기하는 걸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이런 내가 아내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내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느꼈을 때의 상당히 무력하고 무기력했다. 물론, 이러한 감정은 많은 것들이 정리되고 난 이후에 든 감정들이다. 구급차를 불렀을 때는 우선 사람을 살리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이성적인 사고가 쉽지 않았다. 이유를 모르니, 지금 보이는 증상들이 그만큼 더 두려웠다. 칼에 찔려서 출혈이 심한 거라면 지혈이라도 해주면 되는데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119에 전화하고 약 10분 후에 구급 대원들이 초인종을 누르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팀장급으로 보이는 대원에게 아내의 상태를 설명했더니 S병원의 간호사처럼 아내의 과호흡 증상이 심하고, 이로 인해 어지럽고 손발이 아프다고 했다.
똑같은 얘기를 들어서 황당하고 좀 더 자세히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이 사람들이 아내를 대학병원 응급실로 보내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생각에 군말 없이 그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상황을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해 주려고 노력했다. 오늘 아침에 응급실을 다녀왔는데 거기서도 당신과 같은 설명을 했지만 전혀 호전되지 않았으니 큰 병원을 가고 싶다고 전달했다. 나의 조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급팀장은 아내의 상태로는 대학병원을 가기 힘들 거고 아내는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이런 증상들이 있을 거라는 뉘앙스의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간이침대에 앉아 있는 아내와 나를 팀원들과 함께 구급차에 태우려고 했다. 나는 여기서 기가 죽으면 내가 원하는 병원에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도 대학 병원에 한 번 시도해 달라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부탁했다. 팀장은 일단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구급차 뒤 칸에 나와 아내를 태웠다. 우리와 함께 뒤 칸에 탑승한 구급 대원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과 아내의 상태를 물어봤고 멍청하고 무책임한 보호자로 보이기 싫었던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상사에게 이메일을 작성하듯이 사무적인 단어들을 쓰면서 답변하려고 노력했다.
“낮에 장모님이 열을 쟀을 때는 열이 약 37도 났었고, 어지럼증 약을 처방받았으며 먹다가 다 구토했습니다.”
이런 의미 없는 상태 전달을 하고 있는데, 구급차 조수석에 앉아 있던 팀장이 섭외 과정과 결과를 읊어줬다. 주위 대학병원들의 응급실들은 아내를 받아줄 수 없다고 하면서 세 군데의 선택지를 줬다. S병원, M병원,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병원 한 군데였다. 여전히 아내의 증상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팀장은 어차피 새로운 병원을 가게 되면 아침에 했던 검사들을 다시 하게 될 텐데 이중 비용도 방지할 겸 이미 각종 검사들을 진행했던 S병원으로 가길 은근히 권유했다. 우리의 금전 상황을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나는 똑같은 얘기를 할 것 같은 S병원에 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나의 의사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심드렁한 태도를 보인 팀장은 응급실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M병원으로 가자고 했고 뾰족한 대안이 없던 나는 그러자고 했다.
M병원으로 향하던 응급차 안에서는 수백 번 달렸을 우리 집 앞의 도로가 너무나도 달라 보였다. 구급차 뒷자리에서 보는 것도 생소했고, 이렇게 밝은 차에 타본 것도 처음이며, 누군가가 내 옆에서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차가 달리고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차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의 병원인데 그 여정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 구급 대원은 각종 검사들을 진행했는데 역시나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이상이 없다는 게 더 이상했다. 어떤 태도를 취해야 나의 절박함이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구급차는 M병원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배우자가 아닌 보호자의 삶이 시작됐다. 와이프의 하차를 돕고 싶었는데 구급 대원들은 우선 원무과를 가서 접수하라고 했다. 목요일 밤 10시경에 병원을 방문했으니 로비는 기본적인 조명만 켜둔 채 음산한 기운마저 느껴질 만큼 어두웠다. M병원이 위치한 지역이 중국인 비중이 높다 보니 한자와 한글 두 가지 언어가 동시에 표기되어 있었는데 불안감이 높아진 나에게는 이러한 것들까지 위화감으로 다가왔다.
내 앞에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여성 두 분이 접수하고 있었는데, 노모는 본인의 작은 딸이 어떻게든 치료받아야 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나도 간단한 접수를 마치고 돌아서니 구급 대원들은 이미 아내를 응급실에 인계했고 나에게 치료를 잘 받으라며 인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연신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그들은 퇴근하는 사람들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구급차로 돌아갔다. 그들의 태도가 처음부터 형식적이고 딱딱하게 느끼고 있었던 터라 작별을 고하는 그들이 더 사무적으로 보였다.
접수하면서 받은 보호자 태그를 목에 걸고 응급실로 들어섰는데 패기 넘치게 퇴근하고 마실 술과 안주를 고르는 간호사들과 그들을 장난스럽게 타박하는 응급실장이 나를 맞이했다. 의료진 파업으로 인해서 북적북적할 거라고 여긴 응급실과 그로 인해 상당히 예민한 의료진을 기대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침상은 아내를 포함하여 3명이 점유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한 명은 팔에 깁스를 해서 기본적인 조치는 끝났으며, 나머지 한 명은 내 앞에서 치료를 꼭 받게 해달라고 소리치던 노모의 작은딸로 추정되는 사람이었다. 최소한 간호사, 의사분들이 바빠서 아내를 못 봐주는 일이 생길 것 같진 않았다.
아내는 겨우 환자복으로 환복 했고, 아침에 겨우 떼고 나왔던 수액을 다시 혈관에 꽂았다. 다시 아내의 ‘상태’를 그들에게 설명했고, 그들은 최근에 아내가 장염을 앓은 적이 있는지, 평소에도 계속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등을 물어봤다. 아내는 3월 초부터 계속 컨디션 난조를 보였으며 최근에 두통도 있었고, 1~2주 전에는 몸살기운이 있어서 수액을 맞고 약 처방까지 받았다고 전했다. 기본적인 처치와 검사를 위해 보호자인 나더러 잠시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해서 로비에 앉아 있었는데, 아까 내 앞에서 접수하고 있었던 노모와 응급실장이 크게 다투고 있었다. 내용을 전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하던 분이 MRI 검사라는 말에 지레 겁을 먹은 듯했다. 사실 MRI 검사료가 두려웠던 것이다.
“어머니! 따님이 지금 나트륨이 많이 부족하고 검사를 해봐야 해요! 지금 이대로 나가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저는 그런 환자를 그냥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따님이 그냥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아니 선생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따님을 죽게 내버려 둘 거냐니까요?”
“쟤가 맨날 저러는 애인데 저는 이제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 선생님…”
바로 옆에서 듣고 있었던 게 아니고 전체적인 대화가 정확히 복기되진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의 대화였다. 결국, 막내딸이 힘들다고 해서 응급실에 일단 집어넣기는 했는데, 막상 치료 비용을 감당하려고 하니 검사가 꺼려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처음 본 환자에 대해서 열의를 보이는 응급실장이라서 아내에 대해서도 열의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어서 병원을 잘 찾아온 게 아닌가 싶은 기대감이 들기 시작하는 대목이었다.
응급실로 다시 들어간 나를 기다리는 것은 구급 팀장이 말했던 것처럼 아내의 기본 검사들이었다. 뇌 CT, MRI, X-Ray 3종 세트를 명 받은 나는 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 엘리베이터를 찾아 나섰다. 밤에 웬만한 조명들이 소등된 병원은 꽤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이때도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하 1층은 당직자가 있어서 불이 어느 정도 켜져 있어 사람 사는 느낌이 조금 들었다. 당직으로 보이던 직원은 우리를 맞아줬고 한 명이 혼자서 3종 세트를 전부 진행하려 하고 있었다. 병원에 가는 일이 없는 내가 그나마 X-Ray 촬영을 해볼 일은 2년에 한 번 받는 직장 건강검진뿐이다. 거기서는 X-Ray, CT, MRI는 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 같았는데, 여기서는 한 명이 다 진행하니깐 응급실장의 열의를 보면서 조금 생겼던 이 병원에 대한 기대는 1점 정도 감점됐다.
아내는 이 검사들을 받으면서 겨우 서있었고, MRI나 CT는 보호자인 내가 함께 들어가 있을 수도 없어서 불안해하며 앞에 보조 의자에 앉아있었다. 검사는 생각보다 빨리 진행됐고, 아내와 나는 다시 1층의 응급실로 복귀했다. 아내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고, 이때까지도 어지러움, 메스꺼움, 손발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을 지속적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말하는 것도 점점 힘겨워지고 있었다. 촬영 3종 세트와 혈액 검사 결과도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그래도 다른 결과를 기대했던 나는 S병원, 구급대장의 말과 똑같은 말을 듣게 됐다. 검사 결과상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진단 또한 나오지 않는다. 결국 M병원 응급실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 진단을 할 수 없고, 그러니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잠시 누워있다가 가도 되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원하면 입원을 시켜줄 수 있다고 했다. 다시 귀가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 같으니 입원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산출물이 바뀌려면 투입물도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아내를 그냥 두고 가자니 아무도 돌봐주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한 나는 결국 비겁하게도 환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만다.
“어차피 집에 가도 똑같을 것 같은데, 하룻밤 정도 있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으…..”
이제 한 글자의 대답조차도 힘겨워진 아내였다. 전혀 괜찮은 것 같지 않으니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병원에 조금만 있으면 나아질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위안만 아내에게 건네면서 입원 결정을 응급실장에게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집에 가도 걱정, 병원에 있어도 걱정이라고 한다면 내가 집에서 돌보는 것보다 의료진이 있는 병원에 하루 정도 아내를 부탁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하루 이틀이면 퇴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간호·간병 통합시스템을 신청하고 아내를 잘 부탁드린다는 무책임한 말만 간호사들에게 건네면서 아내를 병실로 인도했다. 병실로 향하기 전, 아내는 기본 검사를 위해서 키와 몸무게를 측정했다. 그러나 아내는 역시나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다. 아내가 키와 몸무게를 재는 기본적인 검사를 하는 사이에 나는 간호사들과 기본적인 상담을 했다.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면서 우당탕탕 키를 재고 있던 아내는 침대로 옮겨졌고, 이내 곧 병실로 사라졌다. 간호사들에게 설명을 듣느라 특별한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나는 이때까지도 아내가 아침에 일어나면 심심할 것 같으니 무선 이어폰을 갖다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우습지만 이러한 의료진 파업 사태 속에서 어떻게든 입원이 가능한 병원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니 미션 클리어를 했다는 성취감마저 생겼다. 우리 딸을 재우고 나서 당신의 딸은 괜찮은지 불안해하고 있을 장모님께 두 번째 병원에서도 검사 결과에서 특별한 점은 없으니 괜찮을 거라는 섣부른 결론을 전달해 드리기 위해 얼른 택시 타고 귀갓길에 올랐다. 병원에 입원했으니 아내에게 아무 일이 없을 거라는 헛된 믿음까지 갖게 되었다. 나의 짧은 의학 지식으로는 심각한 병을 유추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두 군데의 의료 기관에서 과호흡으로 인한 컨디션 저하라고 했으니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자정쯤에 집에 도착해서 장모님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M병원에서도 기본 검사들을 했는데 S병원에서처럼 특별한 소견은 없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시고 주무셔도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특별히 자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위 입장에서는 헛된 믿음이라도 심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병원에 있으니 별일 없을 것이고, 하루 이틀이면 집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내일이 금요일이니 주말에 집에 올 수 있을 거라는 헛된 믿음을 장모님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외치고 있었다.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누웠을 때, 오늘이 화이트데이라는 사실이 불현듯 생각났다. 어젯밤에 침대에 누워서 오늘 집에 계실 여성분(장모님, 아내, 딸)들께 사탕을 나눠주고 칭찬 좀 받아봐야겠다고 구상했던 것도 생각났다. 사탕은 무슨. 꿈도 야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