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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탐험가 Jun 20. 2024

아버지께 꼭 하고 싶은 말

[모라도 클럽] 두번째 숙제 (주제 : 말하지 못한 이야기)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사랑 고백에 대한 레퍼런스가 많이 쌓여있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어색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러니 사랑 고백은 보통 큰 이벤트에 곁들여지곤 했다. 대학에 입학할 때라든지, 결혼할 때라든지. 그럴 때도 항상 감사 표현을 길게 한 다음에야 “아버지, 사랑해요.” 아니, 아니…. “아버지, 사랑하는 거 알죠?”라고 겨우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도, 나도 표현이 서툴렀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해군.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주로 함정 근무를 하셨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일이 많으셨다. 태풍이 오면 배가 정박해 있다가 파손당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태풍을 피해서 먼바다로 나가게 되는데 그걸 ‘피항’이라고 한다. 그리고 배를 타고 멀리 나가서 훈련이나 작전을 수행하는 때도 있었는데, 그런 걸 ‘출동’ 나간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배를 타고 나가시면 며칠에서 몇 달씩 집을 비우시곤 했다.


또 아버지는 군인신분으로 해외에 자주 나가시곤 했다. 똑똑하셨고, 노력도 하셨다. 해군 내에서는 인정받는 분이셨다. 아버지와 같이 근무하던 분들이 우리 집에 방문하면 한결같이 말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아냐고.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그 당시 군에서는 자체적으로 원어민을 초빙해서 영어 학교를 열었다. 해외로 파견 근무를 보낼 때나 새로운 장비를 들여올 때와 같이 언어가 필요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학교들을 1등으로 수료하곤 하셨다. 자기 보직에서 준위 계급을 달고 제대하셨으니, 그 분야에 대해서 전문가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전역을 하시고 나서도 그 분야의 일을 하시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해군 내에 새로운 장비를 들여오는 일을 했다. 해외에서 장비에 대해 배우기 위해 1년씩 연수를 받는 일도 몇 차례 있었다. 아버지는 원래 그렇게 일해오셨기 때문에,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것 같다. 아버지가 계시면 계시는 대로, 해외로 나가시면 아버지를 기다리며 잘 살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사진 하나를 보게 되었다. 입대하기 바로 전에 찍은 사진이었는데, 무척 충격을 받았다. 사진 속에는 통통하고 복스러운 얼굴의 청년이 반짝이는 눈으로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체중이 60이 될까 말까 한 깡마른 체형을 평생 유지해 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둑이 터진 것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다. 젖살도 덜 빠진 어린 청년에게 그 당시의 군대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도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부대에 들어가 보곤 했다. 함정에 타본 기억도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군생활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종종 말씀하셨던 군생활 고생담들이 기억났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는 함정의 어느 선실에 갇혀 배관에 매달려서 ‘빠따’와 폭력을 수도 없이 당한 일, 상관에게서 이유 없이 뺨을 맞은 이야기, 아버지에 대한 수많은 중상모략들, 융통성 있는 사회생활을 못했기에 험지로 발령받던 일, 뱃멀미와 땅멀미를 번갈아가며 하던 일. 배를 타고 안전장치 없는 바이킹을 타는 듯 풍랑을 겪으면서, 좁디좁고 어두운 그 함정에서 장비를 수리하며, 맛없는 밥을 몇 주째 먹으며, 혈기왕성한 남자들이 스트레스가 가득한 채 부대끼는 공간에서 얼마나 갑갑했을까? 짠 바람이 부는 갑판에서 수평선과 구름만 보이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얼마나 고독함을 느꼈을까?


과거의 감정들이 이제야 속속들이 도착했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한 남자의 외로운 마음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나도 어린 시절의 수없는 나날들 속에서 아버지를 무척 그리워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되새기게 되었다. 두 그리움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끝없는 이야기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시간들이 후회로 다가왔다. 이제야, “아버지 나이”가 되어서야 아버지를 조금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이 수다를 떨고 있는 카페에서 안경을 벗어던졌다. 엄습해 오듯 눈물이 터졌기에. 눈을 비비는 척했다. 왜 이런 건 이렇게 늦게서야 알게 되는 것일까? 인생의 수많은 매듭 중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요즘엔 아버지와 애정표현이 어렵지는 않다.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듯 말할 수도 있고, 만나서 포옹을 해도 자연스럽다. 우리 둘 다 지난한 어색함을 통과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아직도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것들까지 다 표현하고,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마침 집에 고장 난 물건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오셔서 고쳐달라고 했다. 내가 고칠 수 있지만, 이 핑계로 아버지 얼굴을 빨리 보고 싶었다. 이번에 아버지를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의 아버지 나이가 되면 그런 말을 듣고 싶을 것 같다. “살아내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버지.”


안녕하세요! '마음탐험가'입니다.
동탄에서 고전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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