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도송이 Aug 02. 2024

여기서, 자꾸 토하시면 안 돼요

미안한 토, 비싼 토, 아름다운 토

 제목처럼 이번 글은 나의 토사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난번 나의 '경위서' 스토리에 이어 두 번째로 더티한 소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토사물이 똥보다 더럽다고 하는 독자 개취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굳이 더티함의 순위는 정하지 않겠다. 나는 지금부터 내 인생 3번의 토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단언컨대 너무 역겹지만 않으니  완독 해주시기를  권해드린다.




첫 번째는 내 인생의 가장  '미안한 토' 이야기이다. 배냇저고리 시절, 엄마 어깨에 젖을 게웠던 것을 제외하고 남에게 해를 끼친 토는 맹세코 그때가 처음이었다. 국민학교 입학 전이었는지, 후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우리 외갓집은 광주, 경기도 광주였다. 경기도 광주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외갓집이 그다지 멀지는 않았음을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40년 전에는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를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버스 차체의 문제인지, 도로 상태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시외버스 안은 늘 덜덜 거렸다.  엄마와 나는 멀미를 했다. 멀미 게이지가 극에 달하는 지점의 좌표가 있었는데 외갓집 갈 때는 은고개(남한산성 부근), 집으로 올 때는 황산(지금의 하남시 풍산동)이었다.  


서울로 오던 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우리 식구들이 가면 돼지고기를 서너 근 사다가 고추장 제육볶음을 실컷 먹게 해 주셨다. 그날도 외갓집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었다. 과식 탓인가 유난히 멀미가 심했다. 겨우 광주를  벗어났던 만  속이 심상치 않았다.  엄마와 멀미 스무고개가 시작되었다

"엄마 어디야?"

"아직 은고개"

"엄마 나 죽겠어"

"엄마도 죽겠어..."

엄마는 내게 껌을 하나 줬다. 때는 저녁, 정거장마다 타고 내리는 사람으로 붐볐다. 참다 참다 황산쯤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순간,  '엄마, 비비닐 봉지 좀...' 하는데

토가 먼저 나오고 말았다.

꾸역꾸역 @3#29%^%~

조용했던 버스 안은 내 토를 시점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여자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흰 카라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보였다. 맞다. 내가 토한 것은 그 여학생의 까만 교복치마였던 것이다

엄마도 토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딸이 게워 낸 교복치마에 묻은 토를 닦는 게 먼저였다. 내게는 남은 토가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얼굴을 파묻고 그 순간을 외면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교복을 입을 무렵 깨달았다. 그게 얼마나 미안한 토였는지를. 정말 미안했다.


두 번 째는 내  인생의 가장 비싼 값을 치러야 했던 토였으므로 '비싼 토'라 부르겠다.


간부사원 회식날이었다. 그중 여자는 2명이었다. 영업 조직이 센 회사라, 영업 쪽 임원들은 술을 많이 권했다. 물론 나는 술을 권한다고 먹는 편은 아니다. 그냥 나 스스로가 잘 먹는 편이다.

어쨌거나 기분도 좋고 그날따라 유독 맛있는 날이었다.  많이 마셨고 많이 취했다. 사님이 먼저 들어가라고 택시를 잡아줬다. 택시에 막상 타니, 긴장이 풀리면서 울렁울렁한 것이 불길한 느낌이 왔다.

"기사님 창문 좀 열게요"

바람을 쐐도 소용없었다.

기사님께 더 이상 못 참겠다고 간곡히 내려달라고 했으나 자동차 전용도로라 세울 때가 없다고 했다.  좀 만 참으라고 했다.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꾸역꾸역 @3#%^%

기사님의 '아이씨 아시씨' 소리만 귓가에 선명하게 꽂혔다.

택시에서 내릴 무렵 남편이 집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흐릿하게 택시 아저씨와 남편이 설왕설래하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빅딜이 성사되었다.

다음날 남편은 가사님께  택시비와 청소비로 10만 원을 드렸다고 했다. 너무 아까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회사를 출근했다. 이사님을 만났다.

 "이 차장, 택시 기사님께  5만 원 드렸는데 모자라지 않았지?"

앗. 산수를 했다. 도합 15만 원, 나는 그날 15만 원짜리 토를 했다. 택시비 3만 원을 쳐도 12만 원 내 생애에 가장 비싼 토였다.




마지막은 지금 이 순간도 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토'다. 바로  브런치에 쏟아내는 내 '감정의 토'다.


브런치를 시작할 때 작가소개에다 나 스스로를 글쓰기 경단녀라고 소개했다. 한동안 쓰지 못했던 글들을, 2024년 6월 3일부터 갑자기 써대기 시작했다. 쓰고 싶은 게 많았던 시기에는 하루에 두 개씩도 써보고, 늘어가는  라이킷수와 구독자수에  즐거워하는 브런치 빠순이가 되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40살  추억부터, 현재 직장에서 있었던 일까지, 쓰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다. 애써 기억을 소환하면  감정 따라왔다. 감정  스스로  엉기고 응고되고, 수축되고, 때론 팽창되기도 하면서  '감정의  '로 와락 쏟아져 나왔다.


요즘 내가 고 있는 책은 존 케닉이 지은 '슬픔에 이름 붙이기'이다.  이 책을 잠시 인용하자면 요즘 마음은 맥필리(mcfeely) 상태이다.

                                                        맥필리(mcfeely)
(형용사) 예측 가능하고 식상한 정서에- 심지어 그것이 진부하거나 뻔하거나 대중을 상대로 맹목적으로 방송되는 것일지라도-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감동을 받는
어원- Mr Feed McFeely Rogers(프레드 맥필리 조러스 씨)의 가운데 이름. 당신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당신의 감정은 중요하다. 당신은 사랑받고 있다. 당신은 충분하다


나의  별거 아닌 글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응답해 주는 브런치 이웃들이 제법 생겼다.

그들이 내게 주는 라이킷과 댓글은 나에게 맥필리와 같은 감정을 선사한다.


당신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당신의 감정은 중요하다.

당신은 사랑받고 있다.

당신은 충분하다


그런 응원에 힘입어,  당분간 나는 이런 감정의 토를 자주 할 예정이다.

"포도송이 가님 여기서 자꾸 토하시면 안 돼요"

누군가 강제로  밀어내기 전까지 계속할 예정이다.




토의 뒤끝은 시원함에 있다.

지금 나는 매우 시원한 상태, 다음 토를 할 준비가 되어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