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수산물 시장에서 광어와 우럭 회를 떠 오고 과일과 디저트를 준비했다. 남편은 와인도 하자고 했다. 회에 어울리는 '나파 셀라 샤도네이 2020'를 골랐다.
해인이가집에온 것은 처음이니 약간 긴장한 듯 했다. 남편이 28년 전 우리 집에 인사 왔던 날이 기억났다.
할머니는 남편이 된 남자친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밥 먹는 게 탐스럽다며 꾹꾹 누른 고봉밥을 두 그릇이나 먹이셨다,우리는 와인을 두 병이나 마셨다. 우리 해인이는 볼이 빨개지면 더 귀여워지는 구나.
#2. 자매싸움
우리 딸들은 도대체 언제쯤 그만 싸우게 될까? 일곱 살이나 터울이 있어도 만나기만 하면 여전히 티격태격이다. 지수가 톰이라면 희수는 제리다. 이번에는 톰이 공격한다.
새로 산 초록생MLB 잠바를 희수가 먼저몰래 입고 나간 모양이다. 희수는 호시탐탐 언니의 옷장을 노리고 있다.
지수가 꼬맹이 시절 일까지 끄집어내는 걸 보니 맺힌 게 많은 모양이다.
그래,지수야. 응어리가 있거든 맘껏 풀어라. 엄마가 응원한다.
#3. 살림밑천
추석을 앞두고 걱정이 컸다. 열흘 전 도서관에서 일을 하다가 손목 인대가 늘어났는데, 여전히 불편했기 때문이다.
전은 산다 해도 나물이랑 몇 가지 음식은 직접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지수가 큰 딸 역할을 제대로 해줬다. 마트에 가서 카트를 밀고 다니더니, 계산할 때도 척척 물건을 옮긴다. 나물도 같이 다듬고, 첨에는 징그럽다더니 소갈비에 기름도 같이 제거했다. 뒷설거지까지 알아서 해주니 너무 편했다. 큰 딸은 살림밑천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딸이라고 섭섭해했던 할아버지가 이번 차례상을 받으시면 뭐라고 하실까? 내 어깨가 봉긋 솟았다.
#4. 야구장 부녀
둘째 희수는 시험기간인데, 철없는 부녀는 야구장 가는 계획에 신나 있다. 밥상을 앞에 두고 온통 야구 얘기뿐이다. 두 부녀는 LG 광팬이다. 남편은 지수를 7살 때부터 야구장을 데리고 다녔다. 둘은 야구장에서 버거킹 러브세트를 꼭 시켜 먹었으니, 그 꽁냥꽁냥한 부녀의 사랑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급기야 희수는 삐져서 이어폰을 꽂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거기 둘, 진짜 너무 한 거 아냐! 다음주가 시험인 애 앞에서... 눈치 좀 챙기셔요.
#5. 감기몸살
지수가 감기몸살에 걸렸다. 코로나인가 해서 검사를 받았더니, 그냥 감기였다. 많이 아픈지 에너지가 넘쳐나는 아이가 하루종일 방콕 중이다. 다 큰 딸이지만 출근하면서 점심 걱정을 했다. 알아서 시켜 먹거나 해 먹을 테니 걱정 말란다. 아프면서도 손하트를 날린다. 사랑이 많은 아이다. 코 찔찔이가 언제 이리 어른이 되었을까. 어린이집 보낸 후에는 감기를 달고 살았었다. 지수가 아프면 우리 부부는 누가 이번에 연차를 낼래? 눈치를 봤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커서 아파도 혼자 잘 이겨낼 수 있으니 대견하다. 혹여나 내가 이 세상에 없다 해도 조금은 안심이 된다.
#6. 향수 도둑
요즘 이상하게 조말론 블랙베리엔베이 향수가 야금야금 줄어든다. 내가 아껴서 뿌리는 향수다.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딸들 방을 급습했다. 가장 유력 용의자는 희수! 지난번 내 립스틱도 희수가 가져갔다. 교복 카디건에 킁킁 코를 댄다. 안 난다. 오히려 큼큼한 냄새뿐이다. 아무래도 얼른 빨아줘야겠다. 지수 방을 간다. 화장 중이다. 옷장 문을 확 열었더니, 잔향이 옷에 남아있다. 범인은 지수였다. 엄마가 안쓰는 거 같아서 본인이 썼다고 했다.그거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단다. 향수가 유통기한이 어딨냐며 쏘아붙였다. 혹시 몰라 돋보기를 쓰고봤더니정말 있었다. 아끼지 말고 맘껏 뿌려야겠다. 딸에게 뺏기기 전에.
#7. 술 주정
지수가 술을 먹고 들어왔다. 지하철까지 마중 나갔는데, 기분이 뭐가 좋은 지 자꾸 내게 안기려고 든다. '엄마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를 열 번도 더 한 거 같다. 왕년에 나도 술 좀 먹고 다녔던 지라 나무랄 명분이 없다. 술주정도 닮는 걸까? 나도 남편도 술만 먹으면 긍정적이고 애정이 샘솟는 편이다. 낼 아침에는 북엇국을 끓여줘야 하나, 카레나 하려고 잔뜩 맘먹고 있었다. 그래 미운 딸 떡 하나 더 주자. 술 먹은 딸 술국이나 끓여주자.
#8. 아르바이트
요즘 버는 족족 희수 학원비에 쏟아붓고 있다. 마지막 2년은 쏟아부을 각오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수 용돈이 버겁다. 다행히 대학등록금은 아빠 회사에서 나오고 있으나, 한 달에 70~80만 원쓰는 지수 용돈을 당하기 벅차다. 지수가 대학 입학을 할 때 우리는 멋진 부모가 되었다. 아르바이트는 하지 말라고 했다. 돈 벌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공부해서 학점과 자격증을 따라고 했다. 그때는 희수가 중학생이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용돈을 좀 줄이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하겠노라 했다. 집 근처 카페에서 주말 알바를 시작했다. 남편과 커피 한 잔 마시러 카페에 들렀다. 지수가 제법 어른이 된 거 같다.
#9. 여행
지수와 단 둘이 여행은 처음이다. 나는10월까지2개를 소진해야 하는데 남편도 희수도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지수는 지금 휴학 중이니 시간이 차고 넘쳤다. 사실 우리 둘은 여행 스타일이 맞는 편은 아니다. 나의 빡빡한 여행 스케줄을 지수는 질색한다. 그래도 같이 갈 파트너가 없으니 어쩌랴.... 일단 장소는 제주도로 정했다. 딸과의 여행은 처음이니 나는 무조건 딸의 스케줄에 맞출 셈이다. 생애 첫 모녀 여행, 우리는 싸우지 않고 돌아올 수 있을까?아주 많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