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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Sep 25. 2024

진심이 우리의 손을 잡을 때

별이의 특수교사 스승님들의 이야기

고 3 때 이야기다.

당시 고3은 중앙, 대성, 종로 모의고사를 매달 번갈아 봤다.

교육청, 평가원 모의고사가 없던 시절이었다.

모의고사 OMR 카드에는 항상 지망 대학과 학과를 쓰는 게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온라인 모의지원 서비스의 90년대 버전이었다.

그때 짝꿍은 눈이 초승달처럼 이쁜 우리 반 부반장이었다.

짝꿍이 지원하던 학과가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특수교육학과였다.

특수교육학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그때까지 특수교육은 내 인생 관심 밖 영역이었다.

내가 그 짝꿍을 기억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특수교육학과라는 학과를 알게 해 줬고,

내게 처음으로 집에서 만든 슈크림빵 반쪽을 준 착한 친구였다.

노란빛이 영롱한 달콤한 빵이었다.

그런 착한 친구가 특수교육학과를 간다니, 왠지 모르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별이 스승이 내민 손을 잡은 순간


집전화가 울렸다.

"거기 이지수 양 집인가요?"

"네"

"내년에 지수 양이 입학하게 될 초등학교인데요, 어머님 계시나요?"

지수가 7살이 되던 해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근심이 깊었던 시기였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수가!

앞으로 다니게 될 초등학교 특수교사가 전화를 준 것이다.

전화의 요지는 이랬다. 다니게 될 초등학교를 방문하셔서, 학교도 구경하고 상담도 받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지수의 상태도 미리 알고 싶어 하셨다.

지수가 주로 머물 특수학급은 1층 중앙 로비 오른쪽 첫 번째 교실이었다. 크고 넓었다. 오후에 방문했던 터라 서향이었던 교실이 아주 환했다.

특수교사는 임용 2년 차의 신입 교사였다.  수줍은 말투였으나 놓친 이야기는 없었고,  낯빛은 차가웠으나 눈빛은 따뜻했다. 마음이 놓였다. 입학을 했다. 본격적인 지수, 선생님, 엄마의 삼각연대가 결성되었다

나는 지수에 대한 모든 것, 가족들의 성격까지도 선생님께 공유했고, 선생님 역시 학교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전달해 주셨다. 착석 문제, 친구 문제, 급식 문제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선생님과 고민하면서 근심은 덜었다.

기쁨도 나눴다. 특히 지수는 학교를 다니면서 언어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어머니, 오늘은 우리 지수가 '지우개야 어디 숨었니?' 하며 지우개를 찾는데 너무 귀여웠어요

선생님, 어제는 지수가 풍선을 놓치자, '풍선아 잘 가'라고 하늘에 인사를 했어요

우리는 지수의 놀랍게 터지는 언어의 폭죽을 자축하며 함께 환희했다.  

슬픈 날도 있었으니 운동회 날이었다.

일반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 가장 가기 싫었던 행사는 운동회였다. 혼자 뛰지 못하는 지수를 위해 선생님은 지수의 손을 잡고 같이 뛰었다.

학부모까지 수백 명의 인파가 모인 그 자리에서

결승선을 향해 달려들어왔다.

안쓰러움이 과다함유된 관심의 저항력을 뚫고서 말이다

눈물이 넘실거렸다.

울보 엄마.

겨우 2년차였던 선생님 앞에서 유독 나는 많이 울었다.

지수가 8살 때 나는 비로소 둘째를 가졌다.

막달쯤 되었을까? 지수를 데리러 학교에 갔다.

같은 반 아이가 나를 보더니, 옆에 있던  친구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줌마! 얘가 아줌마  뱃속에 있는 아기도 장애인이냐고 말했어요"

내게 안 해도 될 고자질을 했다.

그 아이의 고자질에 나는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둘째를 갖고 가장 두려워했던 상황이었으니

눈물을 한아름 담고 있는 눈물박 정중앙을 겨우 1학년 꼬마가 던진 콩주머니는 정확히 명중시켰다.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특수학급 교실을 찾았다

그리고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었다.

말수가 적은 선생님이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내게 휴지를 건네주셨다.

선생님은 내게 그런 편한 분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삼각연대로 일반학교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딱 3학년까지였다.

특수학교로 전학을 결정했다.

그 뒤 학교와는 작별하였으나 선생님과는 작별하지 않았다.

지수가 살아가는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 했다.

이제 선생님은 어느덧 18년 차 중견 교사가 되었다.


Epilog


한 분의 선생님과의 추억만 글로 썼으나 지수의 잊지 못할 스승은 여럿 계시다.

4살 때 장애인 복지관 조기교실에서 만난 지수의 첫 번째 선생님. 서로의 집에도 왕래했던 사이가 되었다. 길이 없다고 생각할 때, 길을 알려주신 분이었다. 지금은 복지관 팀장님으로 계시니 인연이 깊은 분이다.

6살, 장애 통합 곡교 어린이집에서 만난 선생님. 지수는 결혼식에 초대받은 유일한 제자였다.  미국으로 시집가시기 전까지 연락을 주고받았었는데 너무 뵙고 싶다. 

그리고 특수학교에서 만난 수많은 선생님, 지금 이 순간도 지수를 돌보고 계시는 주간보호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께 나는 늘 감사드린다.


우리 딸이 헬렌켈러처럼 장애를 극복한 위인이 될 수 없었듯이 그분들이 모두 설리반 선생님을 꿈꾸고 특수 교사가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를 만났던 순간, 우리는 같은 마음이었다.

부디 글자라도 깨우치기를,

부디 말문을 열어주기를,

부디 두 눈을 맞춰 주기를,

부디 친구들에게 소외받지 않기를,

부디 걸음의 중심축이 흔들리지 않기를  

 

특수교육에 대한 수많은 정보는 인터넷에서 찾았으나

그곳에서 우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것은 사람이었다. 선생님들이었다.


*지난 9월 10일(화), 모처럼 선생님과  만났다. 8살 고사리손이었던 지수의 손은 선생님 손보다 더 커졌다. 쑥쓰러움이 많은 선생님께 지수와의 투샷은 무리였으니, 그냥 스승과 제자의 예쁜 손만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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