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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Sep 11. 2024

바람이 부는 날 둥우리를 지었다


인생이라는 '생의 책자'에 페이지를 매길 수 있다면

나는 생의 29 페이지에 온통 밑줄을 그을 것이다.

그때는 너무 어렸으나, 너무나 많은 결정을 해야 했고

그 결정이 앞으로의 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페이지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29살에 집을 지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다



내가 시부모님께 첫인사를 드렸, 시댁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기와집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별이를 낳았다.

문제는 별이의 살림이 늘어가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안채에는 방이 2개뿐이었다. 별이 방이 없었다. 안 되겠다. 집을 지어야겠다. 별이를 위한 집을 지어야겠다.

우리 부부는 결심을 했고, 곧 시부모님의 허락이 있었다.

이미 일흔이 다 되신 시부모님은 모든 결정을 우리에게 맡긴다고 하셨다.

기왕 짓는 거, 나의 로망이었던 2층집으로 짓고 싶었다.

덜컥, 평당 300만 원 50평 집짓기 공사계약을 했다.

설계비, 전기, 수도, 옹벽, 전기 기타 등등의 비용은 모두 별도라니....

계약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빚은 점점 늘어갔다. 

생전 처음 집 설계도면을 보았다. 어떤 벽이 내력벽인지 , 비내력벽인지도 모른 체,

도면으로 보는 방의 크기가 얼마쯤 되는지도  모른 체 겁도 없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별이 방 하나를 만들자고, 너무 큰 일을 저질렀다.


2층에는 작은 거실과 서재 하나를 꼭 만들고 싶었다.

별이와 서재에 앉아 동화책을 읽는 상상을 했다.

다람쥐처럼 계단을 오르내리며 즐거워할 별이를 상상했다.

설계도면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 벽은 온통 유리였다.

서쪽의 노을을 창문 너머로 바라볼 수 있으니 저녁이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가슴이 뛰었다. 맨 꼭대기에는 반달 모양의 창도 내었다.

마당에는 폭신폭신한 잔디를 깔았다.

언젠가 별이가 걷게 되면 보드라운 잔디 융단을 밟고 다니겠지

별이 방은 친환경 푸른 벽지로, 천장은 야광 우주로 꾸며 줘야지.

별이를 생각하면 집 짓기는 행복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비는 수없이 많았다.

터를 높여 짓기 위해, 아랫집과 옆집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고  

워낙 모양을 많이 낸 집이라 목수는 틀을 짜는데 고심했고

조적공은 난도가 높다며 투덜거렸다.

설계도면에 있었던 철골조 계단은 나무 계단으로 바뀌었고,

테라스 폐침목도 그냥 방부목으로 바뀌었다.

28살 29살 젊은 부부와 이미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건설업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봄부터 시작된 공사는 추석을 앞두고 완공되었다.

나의 장롱은 텅텅 비었어도, 별이 놀이방에 장난감을 채울 때면 행복했다.

새 집에 사는 것은 한동안 삶의 활력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게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울에 작은 방 한 칸이라도 좋으니

우리 끼리만 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분가 생각이 간절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그 집에 묶어 둔 것은 별이었다.

동네에 장애인복지관이 생겼다.

별이의 치료를 위해서라도 떠날 수 없었다.

인근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겨우 자리가 나서 특수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별이 때문에 이 집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자꾸자꾸 생겨났다.

마치, 떠나지 못하도록 꽁꽁 묶은 뗏목처럼

울렁이는 시집살이를 견디며 나는 그 집에서 정박할 수밖에 없었다.


별이는 자유롭게 자랐다.

한밤 중에 피아노를 두드려댔고,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었다.

쾅쾅! 발망치를 두드리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녔다.

우리 집이기에 가능했다.

친구가 없어도, 놀이터가 없어도 나무 그네는 별이의 쉼터가 되었다.

별이의 자유로움을 방해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알간 영혼은 그렇게 성장했다.


세월이 지났다.

2011년도에 아버님이 5년 후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잘했건 못했건 시부모님의 마지막까지 책임지었으니 

나는 그 집에서 며느리로서 해야 할 도리는 다 마쳤다.

책임을 다한 후에 나도 별이처럼 자유로워졌다.

별이가 나를  붙잡은 덕이었다.



Epilog.


바람이 제법 불어온다.

새가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온다.

나무 솔잎 속으로 숨었다.

은밀한 나뭇가지에 집을 짓는 모양이다.

알을 낳으려나,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새들은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기 위해 집을 짓는다.

바람이 거셀수록, 새들은 더 튼튼한 집을 짓는다고 했다.


2002년 여름,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 뜨거웠다.

별이는 18개월이 지나도 혼자 일어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육아서를 보더라도 별이의 성장은 정상이 아니었다.

곧 내 인생에 태풍이 불어오려나,

바람이 거셀 무렵,  역시 집을 지었다.

본능처럼, 내 새끼를 위한 선택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세상에 하나 뿐인 별이의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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