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 겨울방학에 맞춰 싱가포르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은 패키지와 자유 여행 중간쯤 되는 상품을 선택했다. 여행 계획을 짜는 것도 촉박했거니와 가이드와 차가 있으면 몸이 불편한 큰 딸이 좀 더 편안하게 여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총 3팀 10명이 함께 했다.
여행 일정이 힘들다는 것 외에는 호텔 룸컨디션도, 야외 수영장도, 식사도, 그리고 함께 한 사람들도 모두 좋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힘든 일정에도 불구하고, 큰 딸이 잘 따라와 주었다는 것이다. 대견했다. 함께 한 사람들 역시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다 큰 아이가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이 측은했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아주 대견한 눈길로 보았다.
우리 딸은평소에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을잘했다. 말이 예쁜 아이였다.
말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이의 입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면 아무리 미소에 인색한 사람이라도 미소를짓는다. 택시기사도, 미용사도, 의사도, 간호사도 비록 더 신경 써야 하는 고객이자 환자였지만 아이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끝내는 웃어주었다.
나는 내 딸의 심성과 예의바른 모습을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애가 이렇게 천사 같아요.
마음만은 반듯한 아이예요.
모범생이었던 둘째가 상을 열개쯤 받아왔을 때도 채워지지 않았던 벅찬 감동을 큰 아이를 키우면서 많이 느껴왔다.
이번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에서 내릴 때마다 싱가포르 현지 운전기사님께 큰 딸은 허리를 숙이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기사님도 그 정도의 한국말은 알아들으셨는지 흐뭇한 미소와 함께아이가 마지막 한 발을 내디딜 때까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셨다.
여행 마지막날 조식을 먹을 때였다.
아침 8시 30분, 호텔 식당은 유럽, 아랍, 인도 여러 국가의 관광객들이 뒤섞였다. 뷔페식이니, 수시로 음식을 가져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딸도 음식을 고르고 싶은 지 자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촉사고 같았다. 먼저 정차한 쪽이 피해자. 움직인 쪽이 가해자. 이미 접시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딸이 일어서려다가 부딪친 것이니, 잘못한 쪽은 우리였다. 외국인이 화를 냈다. 외국인의 건장함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때 외국인이 딸에게 화를 내며했던 말은 왜 자신에게 "쏘리"라고 말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다급히 남편은 아이를 대신해 '쏘리"라고 말했다. 우리의 언어는 짧았고, 구구절절한변명은 구차했다. 우리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국인은 화가 풀리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리로 갔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딱 봐도 모르나, 저렇게 화를 낼 일인가, 아니 우리 딸이 외국인 눈에는 멀쩡해 보인다니 감사해야 할 일인가. 하지만 여행 내내, 아니 여행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꾸 곱씹었다.
영어로는 '쏘리', 그러니까, 우리나라 말로는 '미안합니다.' 혹은 '죄송합니다.'
오랜 시간을 복기해 보니, 나는 딸에게 '쏘리'라는 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너는 몸이 안 좋으니까, 장애가 있으니까, 양보받는 것이 마땅해. 배려받는 것이 마땅해.
혹시, 사과할 일이 생기더라도 부모인 우리가 할 일이야.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너는 배려를 받거들랑 그냥 밝고 고운 말만 하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래 바로 그런 말.
남편과 더 깊게 이야기하다 보니 이와 비슷한 일로 둘째 딸과 의견이 충돌된 일이 종종 있었다.
간혹 언니로 인해 동생인 둘째가 몸을 부딪힌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둘째는 언니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나는 큰 애 편을 들었다. 언니는 몸이 불편해서 몰라서 그런 건데, 네가 이해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둘째는 따져 물었다. 언니가 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사과를 할 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는 둘째가 언니를 대하는 게 야박하다고만 느꼈다. 반면 둘째는 늘 언니 편에서만 말하는 나에게 서운해하였다.우리는 가끔 그렇게 서운해서서늘한 사이가 되었다.
둘째 말이 옳았을까?
아무리 배려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고는 하나, 상대방에게 피해를 줬다면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게 가르쳤어야 했나, 설사 아이가 그 모든 상황을 다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나는 일단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사용하라고 가르쳤어야 했나.
어쩌면 다소 확대된 자책감일 수 있다. '쏘리'와 '미안합니다'의 말에는 무게 차가 있고, 입에 '쏘리'를 달고 사는 외국의 문화와 '미안합니다'에 다소 인색한 우리나라의 문화 차이 역시 상당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내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가르치는 것에 인색했다는것이다.
배려는 으레 받아야 하는 당연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감사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미안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비록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진정한 마음이 담긴 사과를 건넬 줄 성인으로 키워야겠다는생각이 들었다.
내 딸에게 지금이라도 '쏘리"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 주는 것. 그것은 이번 여행이 내게 준 아픈 경험이자, 교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 외국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쏘리'가 아니라 '땡큐'가 맞다.
여행 에세이가 이리 우울해서야 쓰겠나 하시는 분들을 위해 진정한 의미를 담아 '쏘리'를 덧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