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노엘

얼마 전 길에서 덩그러니 피어있는 백매화를 봤다. 아직은 춥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 사이에 벚꽃도 조금씩 분홍빛을 내기 시작했다. 시간만은 착실하게 흘러서 봄인 것이다.


한동안 가지 않았던 삼청동을 개인적인 일로 두 번이나 다녀왔다. 변한 곳도 많지만 변하지 않은 길을 걷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20대 무렵의 일들이 조금씩 스쳤다. 정독 도서관의 벤치는 펜데믹의 여파로 착석이 금지돼 있었지만, 오래된 온기가 남아있는 도서관의 안뜰은 여전히 비슷한 모습이었다. 날이 좋았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모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이들이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대를 점령하고 뛰어놀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었을까, 웃음소리가 분수대와 주변 정원을 가득 채웠다. 즐겁고 부드러운 소리가 계절을 재촉했다.


피곤한 탓인지, 갑작스레 어딘가 변화한 건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몹시 깊은 잠을 잔다. 한동안은 중간에 깨어서 고민이었는데, 정신을 잃은 듯, 스위치를 내리듯 잠이 든다. 무언가 변화했거나, 그저 조금 더 피곤하거나. 나쁜 일은 아니다. 갑작스레 잠을 많이 자면 현실에서 살고 싶지 않은 거라는(이와 비슷한) 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글쎄, 많은 것에 정을 주지 않는 삶을 사는 것만은 맞는 것 같다.


일과를 마치고 주차장에서 차에 올라타 문을 닫으면 완벽한 진공상태가 된다. 물리적 진공상태가 아닌 정신적 진공상태가 더 적확한 표현이다. 그날의 일과 모든 감정이 리셋됨을 느낀다. 집과 외부의 현실 사이에 놓인 또 다른 완충재로써의 시공간이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이제부터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것이 마음을 들뜨게 하기도 한다. 깊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라디오나 음악을 켠다.


매일처럼 지나다니는 길목에 보지 못했던 꽃이 피어있었다. 백매화다. 몇 번이 돌아와도 늘 생각한다. 앞으로 더 얼마나 많은 계절들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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