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9월 1일 월요일 -
♥ 에드바르드 하게루프 그리그 (Edvard Hagerup Grieg, 1843~1907)
<페르귄트 모음곡 1번(Op.46)과 2번(Op.55)/ Peer Gynt Suite No.1(Op.46) & No.2(Op.55)>
■ https://www.youtube.com/watch?v=DaevpIE1Mjc (1번 '아침의 기분')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산책을 나섰다가 현관 앞에서 쏟아지는 비에 놀라 다시 우산을 가지러 아파트 계단을 오르던 중 어느 집 문 앞에 놓여있는 비닐로 포장된 신문을 보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는 15층 저층형이라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두 집씩 모두 30세대가 산다.(우리 동만 그렇다) 그중에서 신문을 받아보는 집이 딱 2집이 있는데 두 집 모두 'ㅈ'일보를 구독한다. 산책을 다녀와서는 매일 계단을 올라 집에 가기 때문에 가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두 집 앞에 높인 신문의 1면 표지 리드 기사를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비가 온 때문인지 오늘도 계단 통로 가까이에 신문이 던져져 있어 지나쳐 가는데 기사 리드가 눈에 들어왔다.
"108년 만에 최악 … 재난이 된 강릉 가뭄"
강릉시가 다른 동해 연안의 도시들과 다르게 물부족으로 시달린다는 소식은 이미 한 달 전부터 뉴스에서 여러 번 나왔던 터라 새삼스럽진 않은데 하필 오늘 1면 상단에 큼지막하게 지면을 차지하고 있어야 되는 이유가 있었을까? 집으로 들어와 인터넷에서 다른 주요 일간지들의 1면도 검색해 봤다.
‘극한 가뭄’ 강릉 재난사태 선포… 급수·대체수원 확보 총동원령
재난이 된 강릉 가뭄… 물 15%도 안 남았다
'식수’ 마지노선도 무너졌다…‘최악 가뭄’ 강릉 재난사태 선포
생각보다 여러 전국 일간지들이 1면에서 이 기사를 다루고 있었다. 이미 그 원인이나 해결 방법에 대해서도 여러 심층적인 내용까지 보도된 내용이라 기사 내용은 '전국의 소방차들이 강릉으로 몰려들고 있다거나', '대통령이 강릉시장을 질타했다거나'하는 약간 선정(煽情)적인 추가 사실 이외에 별로 새로운 건 없었다. 생활용수는커녕 식수마저 어렵게 구하고 있다는 강릉시민들을 생각하면 이런 중앙 언론들의 관심이 강릉시민들에겐 분명 고마운 일일테고, 정부 단위의 지원대책을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침 아파트 복도에서 'ㅈ'일보의 이 1면 기사 리드를 처음 읽었을 땐 서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미디어를 통해 이미 여러 번 접한 기사였기 때문이었을까, 기상 재난과 관련된 충분히 잘 뽑은 기사 제목인데도 불구하고 내게 이 제목은 이상하게도 약간은 정치적이고, 또 약간은 게으른 기사 제목 같았다.
물론 내가 강릉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이 아니라서 사안의 심각성에 대한 체감 정도가 달라서일 수도 있고, 이 일간지를 비롯해서 여러 신문사들이 표지에 내걸 만큼 다른 중요한 이슈들을 찾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대통령'이 등장한 뉴스라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민간 소유의 상업 일간지들에게 신문 기사의 배치나 논조는 그들의 영업전략이자 수익과 직결된(?) 부분이라 구독자도 아닌 내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다.
그런데도, 아침부터 기사도 검색하고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글을 쓴 이유가 신문사나 방송사들이 사건을 전달하는 프레임(frame)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프레임을 가장 쉽게 비유하자면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인물과 배경 중 화면에 넣을 부분과 넣지 않을 부분을 결정하는 경계라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깊게 설명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사진의 구도와 조명, 카메라의 위치까지가 다 이 프레임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내가 찍고 싶은 피사체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면서 찍을 것인지 위에서 내려다보고 찍을 것인지 빛은 오른쪽으로 들어는 방향으로 할 것인지 왼쪽으로 들어오는 방향에서 잡을 것인지 등등 내가 사진을 통해 담고 싶은 대상을 표현하는 여러 방식들(연극에서 유래해 이제는 영화나 사진작업에 흔히 쓰이는 용어로 미장센(mise en scène)이라고 하는데, 등장인물의 배치·역할 및 장치와 조명 등에 관한 전체적인 계획) 중에서도 가장 최종단계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결과물을 결정하는 것이 프레임이다.
프레임은 눈과 귀 같은 감각기관이 전달할 수 있는 기능적 한계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실체적 진실의 범위다. 불가(佛歌)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지만 이제 흔하게 쓰이는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말이 있다.(군맹무상(群盲撫象), 인도의 경면왕이 맹인들을 불러 코끼리를 만지게 하고 그 실체를 표현해 보라고 한 일화에서 유래) 각자 다른 부분을 만지고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고집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지만,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도 이런 군맹무상의 경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실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사람이 "기둥 같다"라고 한 것이나, 귀를 만진 사람이 "부채 같다"라고 한 것은 모두 그들 나름의 정확한 관찰과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들 모두는 분명히 코끼리를 만지고 말했다. 그래서 군맹무상일지라도 그들이 각자 상상한 코끼리에 대해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퍼즐 조각 맞추듯 그 실체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다면, 그들 모두는 좀 더 현실 코끼리의 실체에 대해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언론 불신의 시대가 길어지고 있다. 언론이 진영을 나눠 서로의 상대적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추구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 '주장과 선동'은 '언론'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를 넘어 언론인들(? 보편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많은 훌륭한 기자, 피디들)이 좋아하는 말이 있다.
'촌철살인(寸鐵殺人)'!
단 몇 마디의 말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는 건 여전히 신화(神話)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특정한 시점, 특정한 조건에서만 해당될지라도 진실을 가장 지혜(智慧)롭게 드러낸 글이나 작품에 대한 칭찬 같은 말이다.
이런 촌철살인을 담은 기사나 프로그램은 결코 하루 아침의 내공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현장의 진실들에 대해 관심을 놓지 않고 시대나 세상이 바뀌어도 그 변화와 함께하는 현장과 그 현장을 둘러싼 세상 모두를 아우르는 시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요즘은 그런 촌철살인의 기예를 보여주는 언론인들을 찾기는 너무 힘들고, 이름난 유튜버들은 모두가 다 그래보이니 참 당황스러운 세상이다. 오늘 아침은 어느 아파트 현관의 'ㅈ'일보 1면 기사제목에 꽂혀 아침 이야기치고는 쓸데없이 무겁고 길어졌다.
9월의 첫날, 한 주의 시작, 그리고 가을의 문턱을 넘는 날이다 보니 몸과 마음에 힘이 좀 많이 들어갔나 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기 위해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1번 중 '아침 무드'를 골랐다.
1874년, 독일 드레스덴에 거주하고 있던 헨리크 입센은 그리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희곡 《페르 귄트》를 위한 부수음악 작곡을 요청한다. 당시 입센은 1867년에 완성한 이 5막의 운문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그리그는 이 제안을 받고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 이유는 입센이 보내온 희곡이 자신의 작곡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노르웨이의 또 다른 대문호 비외르손과 함께 오페라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외르손과 입센 두 사람은 모두 노르웨이의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현재 오슬로 국립국장의 왼편에는 입센의 동상이, 오른편에는 비외르손의 동상이 서있을 정도로 당시 뛰어난 문재(文才)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4살 차이의 두 문호(헨리크 입센은 1828년 생, 비욘스제른 비외르손은 1832년 생으로 입센이 4살 더 많았다)는 왠지 모르게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해 상대에 대한 존경과 함께 질투의 감정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그는 정말 누구와 작업을 먼저 해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리그가 망설임 끝에 입센의 제안을 수락하고 그와의 작업을 먼저 하기로 결정해 버렸다. 이에 비외르손은 "불같이 화를 냈"고 이 일로 인해 비외르손은 그리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다고 한다. 당시 이 일화는 노르웨이 예술계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는데, 재밌는 것은 나중에 비외르손의 딸과 입센의 아들이 서로 결혼하면서 입센과 비외르손은 애증의 관계를 이어갔다는 점이다.(그런데 그리그와 비외르손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다.ㅠㅠ)
입센과의 작업을 선택한 그리그에겐 비외르손과의 갈등 못지않은 까다로운 입센의 요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입센은 그리그에게 매우 구체적으로 음악에 대해 간섭을 했는데, 이를 테면, 4막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국제적인"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각국의 국가(노르웨이, 스웨덴, 독일, 프랑스, 영국)를 섞어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의 번잡하고 작곡가 고유의 영감을 건드리는 요구들이 많았던지라 그리그는 이 곡을 쓸 당시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결국 그리그는 입센에게 그가 제시한 여러 조건들로는 작곡하기가 힘드니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음악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결국 곡을 완성한다. 1875년 여름에 완성된 부수음악은 총 27곡 90분 분량으로, 1876년 2월 24일 크리스티아니아(현 오슬로)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그는 후에 이 중에서 8곡을 선별하여 두 개의 연주회용 모음곡으로 편집해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페르 귄트 모음곡 1번(4곡 Op.46), 2번(4곡, Op.55》이다.
입센이 비외르손과 같이 작업했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지는 미지수지만, 입센과 비외르손의 갈등, 입센과 그리그의 갈등 사이에서 탄생한 이 작품은 어떻든 클래식 음악사를 빛내고 있는 명곡으로 클래식 마니아들에겐 이 세 사람의 애증의 관계가 그저 또 다른 재밌는 감상포인트가 되었고, 결국 창작의 고통과 함께 관계의 단절이라는 아픔을 감내해 준 그리그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모음곡 1번
1. 아침의 기분 (Morning Mood)
모로코 해안의 평화로운 아침 풍경을 그린 곡으로, 그리그의 서정적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표곡이다.
2. 오제의 죽음 (Åse's Death)
페르 귄트의 어머니 오제가 임종하는 장면의 음악으로, 깊은 슬픔과 애절함을 표현한 작품으로 가끔씩 장송용 만가로 쓰이는 곡이다.
3. 아니트라의 무곡 (Anitra's Dance)
아라비아 공주가 춤추는 장면으로, 현악기와 트라이앵글로 연주되는 이국적이고 우아한 무곡.
4. 산왕의 궁전에서 (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
산 정령들의 왕궁에서 벌어지는 환상적 장면을 그린 행진곡풍의 곡으로, 점차 격렬해지는 리듬이 특징이다.
모음곡 2번
1. 잉그리드의 탄식
페르 귄트에게 유괴당한 신부 잉그리드의 슬픔을 표현한 곡
2. 아라비아의 춤
아랍 왕궁에서의 춤 장면을 묘사한 3부 구성의 무곡
3. 페르 귄트의 귀향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페르 귄트의 심정을 그린 곡
4. 솔베이지의 노래
페르 귄트를 끝까지 기다린 솔베이지가 부르는 애절한 노래
곡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입센의 희곡 《페르 귄트》의 줄거리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농 출신이지만 몰락한 페르 귄트는 허황된 꿈을 꾸는 몽상가다. 농부의 딸 솔베이지와 사랑을 맹세하지만 모험을 위해 그녀를 떠나고, 어머니 오제가 세상을 떠난 후 더 먼 곳으로 유랑을 떠난다. 아프리카에서 여러 모험을 겪으며 큰돈을 벌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와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솔베이지의 품에서 생을 마감한다.
모음곡 1번의 3곡과 4곡, 2번의 1곡과 2곡은 이색적인 멜로디와 리듬으로 페르 귄트의 여정이 잘 묘사되어 있고, 2번의 4곡 '솔베이지의 노래'는 극 중에서 3막, 4막에서 기악곡으로도 연주되지만, 5막에서는 백발이 된 솔베이지의 무릎에 누워 페르 귄트가 눈을 감는 장면에서 소프라노가 직접 부른다.
모음곡들의 소품 하나하나가 노르웨이 민족음악의 정서와 낭만주의적 서정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줄거리를 생각하며 어떤 곡을 들어도 다 귀에 쏘옥 박히는 주옥같은 작품들이다.
■ 먼저 기악곡으로 전곡을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로 감상해 보고,
https://www.youtube.com/watch?v=J-1Bob1dU18&list=PLiN-7mukU_RF_uhPJ7AwCLkrabFBetEcP
■ 페르 귄트의 귀향을 애타게 그리는 '솔베이지의 노래'는 이 노래에 관한 한 최고라고 평가를 받는(!?) 노르웨이의 소프라노 마리타 솔베르그의 음성으로 들어보자.
- https://youtu.be/R8AD75_sNJM
♥ 지루함
- 조병화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지루할 거다
그 기다림이 너무나 먼 인생은
또한 지루할 거다
그 기다림이 오지 않는 인생은
더욱 더 지루할 거다
지루함을 이겨내는 인생을 살려면
항상 생생히 살아 있어야 한다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그 무엇을 스스로 찾고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산다는 걸 잠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모습을
항상 보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