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 2025년 6월 25일 수요일 -

by 최용수

♡ 한국의 가곡들 '비목', '그리운 금강산' 외


* 사진이미지 : 백마고지 발굴 유해 (출처 : KBS 홈페이지)


https://www.youtube.com/watch?v=mZGtanxU6ag ('비목'/조혜영 편곡, 안양시립합창단)


세상이 빠르게 디지털화되면서 이제 달력을 벽에 걸어두는 집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내 방에는 아직 전지 반정도 크기의 종이 달력이 책상 뒤편 벽에 걸려 있다. 한 달의 일정, 특히 가족의 생일이나 제사 같은, 일상에 쫓기다 보면 놓치기 쉬운, 그러나 잊고 지나치면 결국 이런저런 마음의 부담을 각오해야 하는 그런 날들이, 달마다 한 두 개씩 날짜가 표시된 숫자 위에 싸인펜으로 짧은 메모와 함께 동그라미 쳐져 있다.

오늘은 6월 25일, '6.25 전쟁 발발일'이란 글자가 날짜 네모 칸 아랫부분에 조그맣게 인쇄되어 있다.

전쟁을 겪진 않았지만 우리 세대에게 '6.25 전쟁 발발일'이라는 이 짧은 문구는 어릴 적 '반공'이라는 접두어로 시작되는 수많은 웅변대회, 글짓기 대회, 사생 대회의 기억과 함께, 우리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내전이 시작된 날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첫 대리전이 시작된 날이라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글을 쓰는 있는 동안 거실 TV에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이 극적인(!?) 휴전으로 마무리되는 듯 보인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세계는 다시 안정을 찾아가겠지만, 역사는 항상 다음 역사를 위한 복선(이란 정권을 무너뜨리고 싶은 이스라엘의 야욕 같은)을 남겨두고 있다.

결국 지난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는 자에게만 반복되는 그 역사의 비극에서 탈출할 수 있는 열쇠가 주어질 것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이번 전쟁으로 어떤 교훈을 얻게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도 한국전쟁이 남긴 교훈을 세계는, 우리는 과연 제대로 배우기는 한 걸까?

근대 과학문명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이성 능력에 대한 과신은 모두 끔찍한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그 파국 같았던, 인간의 모든 이성능력이 시험받았던 1,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인류는 여전히 전쟁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전쟁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실존을 위한 인간의 생존 본능 같은 것일까?




오늘은 모처럼 한국 가곡을 골랐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한국 가곡 중 하나다.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위 시처럼 쓰여진 가사는 우리 세대라면 너무도 익숙한 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의 가곡 '비목(碑木)'의 노랫말이다. 이 가사를 쓴 한명희 씨는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양방송(TBC)의 PD로 활동하셨던 분이다. 1939년 충청북도 충주생으로 1960년대 군 복무(ROTC 2기, 육군 소위)를 마친 뒤, TBC(동양방송) 방송국 프로듀서 공채 3기로 입사했다. PD(프로듀서)로 입사해 맡은 프로그램이 ‘가곡의 언덕’, ‘가곡의 오솔길’ 같은 우리나라의 가곡을 소개하는 음악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악프로그램 같은 경우 미군 부대에서 유행하던 팝송과 같은 외국 곡들 일색이었는데, 당시 TBC 회장(고 이병철)이 국악 애호가였던 덕분에 국악을 지키고 발굴하면서 우리말 가곡 보급에도 나설 수 있었다고 한다.

가곡 '비목(碑木)'은 한명희 씨가 한국 가곡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PD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기 힘들었던 곡인데, 어느 날 가곡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친하게 된 작곡가 장일남 씨가 새로운 가곡을 쓰려고 하는데 가사가 필요하니 좀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노랫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도 해서 수락할까 한동안 망설였으나, 군복무 시절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비무장지대(DMZ) 초소에서 근무하던 중, 잡초가 우거진 산모퉁이에서 발견했던 무명용사의 돌무덤과 비목의 아픈 기억을 떠올려 시를 써서 전달했고, 이 시에 장일남 씨가 곡을 붙여 1969년에 발표한 곡이 바로 이 가곡이다. 이 곡은 당시 방송국 내에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음반으로 만들어져 방송을 타자마자 온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 가곡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한반도를 가르는 휴전선의 위(북한) 아래(남한) 각 2Km씩 전체 폭 4Km, 길이 약 248Km의 비무장지대(DMZ)!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조인 직전까지 남북의 군대가 점령한 고지를 중심으로 휴전선이 그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휴전협정 체결 직전까지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가 대부분 이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마자 바로 비무장지대를 지키기 위한 철책과 각종 방어시설이 설치되면서 전투 후 미처 수습되지 못한 수많은 병사들의 시신과 유품들은 안타깝게도 비무장지대 안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한명희 씨가 근무했던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일대에도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수습되지 못한 국군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많았다고 한다. (다행히 2007년부터 국방부 산하 유해발굴감식단이 설치되어 현재 비무장지대의 국군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미군과 외국 군인들의 유해와 유물까지 발굴하여 신원이 확인되면 가족들을 찾아 직접 전달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 곡은 4분의 4박자로 전체적인 조성은 라장조이나 라장조의 나란한 조인 나단조 음계가 번갈아 사용되고 있다. 곡 전체의 선율 중 가장 낮은 음으로 아주 여리게(pp)로 시작되지만, 점차 상승하여 11~12마디, ‘두고 온 하늘가’에서 선율 중 가장 높은 음과 점점 세게(crescendo), 강하게(f), 음을 충분히(tenuto) 등 여러 악상기호가 사용되며 절정을 이룬다. 1절과 2절 공통으로 작사가의 직접적인 감정이 드러나는 두 번째 도막 앞부분(9∼12마디)이 음악적으로 절정을 이룬다. 조금 느리고 슬픈 듯이(Andantino lamentoso)라는 지시어처럼, 화약 연기 사라진 전장, 두고 온 고향을 그리며 숨을 거두던 병사의 모습과 그의 이름이 적힌 비목과 적막한 산 분위기가 회화적으로 묘사되며 쓸쓸한 감정으로 마무리된다.


‘비목’이 작곡된 1960년대는 한국 가곡이 현대적이고 다양한 스타일로 크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당시 한국 가곡은 창작 가곡의 르네상스 시대로 불릴 만큼 많은 작곡가들이 등장해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이어졌는데, 비목을 작곡한 장일남 곡의 '기다리는 마음'(김민부 시), '그리운 금강산'(한상억 시, 최영섭 곡), '얼굴'(심봉석 시, 신귀복 곡) 등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곡들은 거의 이 무렵에 작곡되었다. 현대적인 작곡 기법과 전통적 서정이 어우러진 우리 가곡들은 주로 1960~70년대에는 학교 교육과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현재 가곡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정규프로그램은 KBS의 '정다운 가곡'이 유일하다.


클래식 장르에서 가곡(Art Song)은 좀 특별한 영역에 있는데, 시와 음악이 결합된 형태의 19세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장르로 특히 슈베르트의 독일 가곡(Lied)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프랑스의 멜로디(Mélodie), 이탈리아의 로맨스(Romance) 등 각 나라마다 자국의 언어적 특성과 음악적 전통이 반영되어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가곡은 사회의 문화적 저변이 넓어지고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대중가요와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며 전통적인 가곡은 수요와 공급 모두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가곡은 대체로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성악가의 기량이 드러나는 표현력이 필요한 곡들이 많다. 가사 또한 시에서 유래한 것들이 많다 보니 함축적이고 우회적 표현이 많아 대중가요처럼, 운전하면서 일하면서 듣기에는 어려움이 좀 있다. 그래서 요즘 가곡들은 대중적인 선율부를 도입하고, 예전에는 노래를 부각시키기 위해 피아노 반주에만 의지했지만, 과감하게 오케스트라 반주를 도입하기도 하는 등 소위 크로스 오버적인 시도를 통해 그 장르적 폭을 활발하게 넓히고 있다. 이는 대중가요로는 다 채워줄 수 없는 예술적 요구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풍부한 예술성과 표현력이 뛰어난 크로스 오버 가곡들이 그 빈틈을 메워가고 있는 셈이다.


■ 오늘은 1960년대 한국 가곡의 르네상스 시기에 만들어진 곡들을 집중 감상해보면 좋을 듯한데, 먼저 장일남 곡, 한명희 시 원곡의 '비목'울 바리톤 고성현의 목소리로 먼저 감상해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wE4wpdOSIgk


■ 이어서 역시 김민부의 시에 장일남이 곡을 쓴 '기다리는 마음'을 테너 박세원의 노래로 감상하고,

- https://www.youtube.com/watch?v=XtP4KV7PvN8


■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한국 가곡의 합창 버전 '그리운 금강산'(한상억 시, 최영섭 곡)을 대우합창단의 연주로도 감상해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RrEd9LKRgC4


■ 이제 가곡의 장르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크로스 오버화 되었지만, 소프라노 조수미의 노래로 드라마 OST로 사용된 '나 가거든'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이 노래는 좀 더 확장된 크로스 오버형 가곡이라고 분류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 https://www.youtube.com/watch?v=azBm_e5Jrbs



♡ 삼대(三代)


- 나태주


군에 입대하여 신병교육을 받고 있는 아들아이한테서 편지가 왔다. 아버지, 이곳에 와서 가장 힘든 구보훈련 시간, 아버지 말씀을 떠올리면서 잘 견디고 있습니다. 앞사람이 한 발자국 뛰면 너도 한 발자국 뛰고, 그저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면서 뛰라는 말씀,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실은 그 말씀, 내 말이 아니라 지금부터 31년 전, 내가 논산육군훈련소에 입대하여 훈련받을 때 아버지가 편지로 적어 보내주신 말씀인데, 늘 여리고 믿음성 가지 않던 자식이 군에 입대하여 힘든 훈련의 전 코스를 어떻게 이겨내기나 할지 걱정이 되어, 당신이 6.25전쟁 당시 역시 논산훈련소 창설멤버로 입대하여 훈련받으며 체험으로 얻으신 교훈을 내게 물려주신 건데, 오늘은 그 말씀 당신의 손자에게 가서 씩씩하게 살아서 숨쉬고 있음을 본다. 얘야 앞사람이 한 발자국 뛰면 너도 한 발자국 뛰고, 그저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면서 뛰려무나. 눈물겨운 강물이 되어, 어서 가자 어서 따라 오너라, 삼대를 이끌고 간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14화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