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7월 25일 금요일 -
♡ 장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
<'밤의 발레' 서곡 외/ La Nuit Ballet - Ouverture and others>
■ https://www.youtube.com/watch?v=AJHZcRhsdbo '밤의 발레' 중 서곡
어젯밤도 태양이 남겨놓은 뜨거운 열기에 잠을 설친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열대야를 피해보겠다고 밤새 에어컨을 켜놓고 자게 되면 다음날 아침 몸은 그야말로 천근만근, 어느 강장제 CF에서 나온 것처럼, 늘어진 떡처럼 되어버린다. 정말 요즘은 매일 밤 무더위와 간단없는 전쟁을 치르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번 주말은 또 새로 발생한 태풍 7호와 8호의 영향으로 한반도가 열섬에 갇히게 되면서 섭씨 38도를 넘나드는 '극한 폭염'이 예고되어 있단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여름을 모두 헤집어 떠올려봐도 이런 극단적 폭염과 열대야에 대한 경험은 없다. 내 기억 속 여름은 6월 말부터 장마와 함께 시작되었고, 늦어도 7월 중순까지 장맛비가 끝나고 나면 잠시 섭씨 30도를 조금 넘는 무더위와 열대야(섭씨 26도를 넘지 않는 밤, 그것도 8월까지 고작 일주일 정도)에 '와 여름이다~'하고 외칠 때 쯤이면 때맞춰 필리핀 근해에서 발생한 태풍들이 하나 둘씩 한반도로 올라와 여름 무더위를 식혀주곤 했었다.(그 당시는 폭염보다는 태풍으로 인한 수재가 항상 중요한 뉴스였다) 그리고, 태풍이 우리나라까지 올라오지 못하면 그제야 섭씨 33도 정도 되는 '불볕더위'(당시에는 섭씨 33도만 해도 대단한 더위였고, 이 정도 온도를 언론은 '불볕더위'라고 했다)의 여름을 제대로 겪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은 바닷바람 덕분에 낮 기온이 30도를 넘는 일도 흔하지 않았고, 섭씨 26도를 넘어가는 열대야는 일 년에 고작 며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렵 정말 여름이 왔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상징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건 해운대를 찾은 피서객이 100만 명을 넘었다는 TV의 뉴스보도와 격렬하게 여름 하늘을 가득 매운 매미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매미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것 같다.(폭염 때문일까? 보건당국의 적극적인 방제 때문일까?)
언젠가 이렇게 뜨거운 여름이 오면 소개해주고 싶었던 음악이 바로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 서곡이다. 다음 영화 링크는 2000년 프랑스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이 연출한 영화 <왕의 춤>에서 서곡이 흘러나오는 장면이다.
■ https://www.youtube.com/watch?v=SYHPNgSUIoE (영화 '왕의 춤' 중에서)
'밤의 발레( Nuit Ballet)'는 우리에게 '태양왕'이라고 알려진 루이 14세를 위해 릴뤼가 작곡한 발레음악이다. 열네 살의 어린 왕, 루이 14세는 실질적인 권력을 쥔 어머니 '안 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 앞에서 황금빛 의상과 구두를 착용하고 '태양의 신 아폴론'으로 분장한 채 궁정 연회에서 '밤의 발레'를 춘다. 힘차고 절도 있는 안무와 웅장한 음악, 나이는 어리지만 장차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될 거라는 것을 태양신 아폴론의 상징을 통해 루이 14세는 보여준다. 1653년 궁정에서 열린 이 발레 공연은 장차 왕실과 귀족들을 장악하고 훗날 그가 '태양왕'이라 불리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장바티스트 륄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14세 이후 프랑스에서 활동한 프랑스 작곡가다. 륄리는 그의 일생 대부분을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위해 일했으며 특히 '코미디 발레'라는 장르를 발전시켜 바로크 시대 프랑스 오페라와 발레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륄리의 부모님은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륄리는 음악을 포함하여 다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기타와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이런 재능 덕분에 1646년 프랑스 귀족, 샤를 드 기즈(Charles de Guise) 공작이 이탈리아에 왔을 때 그의 눈에 띄어 함께 파리로 가게 된다.
파리에서 륄리는 루이 13세의 조카딸이었던 몽팡시에 공작부인의 시종으로 일하면서 역시 그녀 밑에서 일하고 있던 니콜라 메트뤼(Nicolas Metru, 1610~1668)에게 비로소 음악과 작곡법을 제대로 배우게 된다. 그런데 몽팡시에 공작이 부르봉 왕가에 저항하는 프롱드의 난에 참가해 실패하고 1652년 파리에서 추방된다. 이때 륄리는 몽팡시에 가문을 나와 이름을 프랑스 식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음악 관련된 일을 찾다가 프랑스 궁중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무용수로 발탁된다.(프랑스 식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 릴뤼의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Giovanni Battista Lulli)였다.)
당시 14세의 루이 14세는 춤과 음악에 대해 심취해 있었는데, 마침 궁중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무용수로 활동하던 장바티스트 륄리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왕의 직속 악단인 '프티 비올롱(Petits Violons)'의 감독으로 선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653년 륄리는 발레를 좋아했던 어린 루이 14세를 위해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를 작곡한다.
'밤의 발레'는 4막으로 구성된 당시에 유행하던 발레극 형식으로, 특히 루이 14세는 이 발레극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여섯 인물의 배역을 연기했는데, 그중에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아폴론으로 분장하여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을 연기한 장면 때문에 이후 그가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루이 14세의 어머니와 왕실귀족들은 루이 14세의 압도적인 춤과 연기에 장차 그가 프랑스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릴뤼가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와서 일찍부터 왕실 소속 음악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륄리는 음악적 재능과 함께 출세욕과 성취욕 또한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루이 14세를 위해 그가 좋아했던 수많은 발레곡을 작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 풍자극으로 인기를 구가하던 극작가 몰리에르를 위한 음악도 다수 작곡해 주었는데, 그중 《강제 결혼》(1664), 《사랑의 의사》(1665), 《서민귀족》(1670)의 음악을 직접 맡아 작곡하여 큰 성공을 거두면서 프랑스 왕실에서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된다.
륄리는 '코미디 발레'의 형식을 정착시켜 프랑스 발레와 발레음악 발전 전반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특히 여기에는 극작가 몰리에르의 영향도 컸다. 극작가 몰리에르는 음악을 그의 연극을 위한 부수적 요소라고 믿고 있었지만, 반대로 륄리는 음악이 발레나 연극을 위한 부수적인 요소라기보다는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역할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후 이 두 사람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된다.
1660년대 루이 14세를 등에 없고 권력과 부를 함께 거머쥐었던 릴뤼는, 루이 14세가 점차 나이가 들고 몸이 불어 춤을 출 수 없게 되자 발레공연 출연도 그만두게 되면서 점차 왕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륄리는 궁중발레보다 오페라 음악에 더 관심을 쏟게 된다.
당시 프랑스 오페라 시장은 극작가이자 시인이었던 피에르 페렝(Pierre Perrin, 1620-1675)이 루이 14세에게 이탈리아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오페라를 프랑스어로 직접 프랑스에서 만들 것을 제안해 이의 독점권을 허락받으면서 그가 1669년 설립한 '오페라 아카데미(Académie d'Opéra)'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페렝은 작곡가 로베르 캉베르(Robert Cambert)와 손잡고 프랑스 최초의 오페라로 평가받는 《포몬(Pomone)》을 1671년에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하필 동업자인 캉베르의 횡령과 사기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결국 파산하고 빚 때문에 투옥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궁정 음악가 륄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672년 3월 페렝으로부터 오페라 독점권을 사들여 그 해 8월 이 권리를 기반으로 '오페라 아카데미'를 개명하여 '왕립 음악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Musique)'를 창립하게 된다. 이때부터 릴리는 몰리에르와 결별하고 극작가 필리프 키노(Philippe Quinault)와 합작하여 서정 비극 또는 음악 비극(Tragedie lyrique)이라 불리는 새로운 장르의 프랑스식 오페라를 개척하게 된다.《카드뮈와 에르미온(cadmus et hermione, LWV 49)》을 시작으로 해마다 수많은 서정 비극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며, 릴뤼는 다시 루이 14세의 관심을 끌게 되고 결국에는 1681년 루이 14세의 궁정비서로 발탁되고야 만다.
륄리는 야심 찬 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사실 뛰어난 지휘자이자 혁신가였다. 그는 미뉴에트, 가보트 같은 빠르고 생동감 있는 새로운 춤곡들을 궁정 발레에 도입했을 뿐 아니라 긴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박자를 맞추는 방식으로 오케스트라의 연주력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현악기 주자가 활을 동일한 방향으로 긋도록 하는 '균일한 운궁법'을 도입하여 유럽 오케스트라 연주의 표준도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야망과 재능만큼이나 극적인 최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687년, 루이 14세의 병환 회복(루이 14세는 무려 72년이라는 재임기간을 누렸지만, 평생 소화기 대사질환과 통풍, 피부병 등 끊임없는 질병으로 고통받았다)을 축하하는 '테 데움(Te Deum)'을 지휘하던 중, 박자를 맞추던 무거운 지휘봉으로 자신의 발등을 잘못 내리찍는 사고를 당한다. 상처는 덧나 괴저(壞疽)로 발전했지만, 무용가였던 그는 다리를 절단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끝내 거부했다. 그리고 결국 이 상처로 인한 감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선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장바티스트 륄리는 태양왕의 절대 권력을 음악으로 구현한 '왕의 남자'로 루이 14세 시대의 화려함과 장엄함을 음악적으로 잘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프랑스 바로크 양식의 완성시켰다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 같은 곡을 한국의 연주자들이 연주한 버전 중 지휘장 대신 북을 이용한 연주가 인상적인 곡을 감상해 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1iOrHyIgimc
■ 루이 14세를 태양왕으로 만들어 준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의 1653년 원곡으로 재연 연주한 버전도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4TxPhruLo4o
■ 장바티스트 릴뤼의 재능과 독차성을 느낄 수 있는 '터키식 의식을 위한 행진'이란 곡도 함께 감상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Sy-yugPw_X8&list=RDScyTHuKDCFc&index=2
♡ 햇살의 분별력
- 안도현
감나무 잎에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 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 하고요
장닭 볏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볏만큼 붉고요
염소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수염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차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거름 더미에 뒹구는 햇살은 거름 냄새가 나고요
오줌통에 빠진 햇살은 오줌 냄새가 나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쎄빠지게 일하다 가고요
** 이제 태양은 좀 쉬어줘도 될 텐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