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빛의 소녀가] 박노해 시 그림책, 느린 걸음
글을 잘 쓰기 위한 100일간의 챌린지
'그림책에서 첫 문장을 빌려오다'
오늘은 박노해 시인의 [푸른빛의 소녀가]의 한 문장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별 것 아닌 문장 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서 마음에 꽂힌다. 관통당한 구멍에선 피가 흐르고 새살이 돋아날 거란 희망을 주는 딱지가 앉는다.
박노해 시인의 시는 그렇다.
아마도 시인의 처절한 삶이 녹아든, 인고 끝에 맺은 문장들 때문이겠지. 살아있는 글들이라.
[푸른빛의 소녀가]는 시인의 첫 번째 시 그림책이다. 저 먼 행성에서 불시착한 푸른빛의 소녀와 지구별 시인의 가슴 시린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림은 우크라이나 태생 러시아 작가 말레비치가 그렸다. 우크라이나 태생 러시아 작가라니. 책이 출판된 게 2020년 11월 3일이니 적어도 2020년 11월 이전에 이 그림들을 그렸겠지? 말레비치는 전쟁을 묘사한 그림을 그리며 2022년의 전쟁을 예상했을까?
중력의 무거움, 인생의 짧음, 너무 자주 아픈 몸과 번뇌로 가득한 마음, 지구를 짓누르고 있는 폐기물과 무기들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아, 희망.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그 단어를 어쩔 수 없이 나도 입에 담아 본다. 나도 나를 알지 못하고 서로를 죽이기 위해 삶을 바치는 이들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지만 시인의 곁에서 함께 걸어가 보기로 다짐해 본다.
저 먼 행성에서 불시착한 푸른빛의 소녀가 내게 물었다.
“지구에서 좋은 게 뭐죠?”
조금 전까지 멸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림책 수업 시간에서 다비드 칼리의 <그림자의 섬>을 읽으며 동물의 멸종을 반면교사 삼아 인류의 멸종을 고민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모든 동물들 가운데 인간은 멸종될 위험이 가장 큰 동물이다. 우리는 판다와 표범을 걱정하지만, 판다와 바다표범은 우리를 보호해 줄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핵무기, 농약, 고엽제, 석유, 휴가철 별장 들과 함께 우리가 영원히 사라져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라는 스테파노 벤니의 말을 읽었고 바이러스, 전쟁, 기후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류의 멸종은 이미 시작되었다 말하고 멸종의 과정이 매우 험난할 거라 이야기했다.
그때 한 선생님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인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듯 말했다. 그분은 성직자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녹고 있던 빙하가 멈추고 전쟁이 끝나고
다퉜던 이들이 화해하고 사랑을 갈구하던 이들의 마음이 충만해진 것만 같았다.
지구에서 좋은 게 뭐냐고?
희망이다.
인간은 미래를 마음껏 부정적으로 상상할 능력이 있지만 반대로 아름다움을 말하고 서로를 북돋고 꿈꿨던 미래를 현재로 만들 능력도 있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고
선의가 복수로 돌아오고
의도치 않는 미움을 받고
몸의 고통, 상실과 절망을 겪으며
그래도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전쟁을 일으켜 죄 없는 아이의 다리를 빼앗고
온 세상의 주인인양 지구의 것을 마음껏 가져다 쓰고
발버둥 치며 죽어가는 생명체가 있건 말건 내 배만 채우면 된다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느냐 묻는다면,
타인의 아픔을 보고 애달파하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작디작은 미물의 고통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시의 한 구절을 읽고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그들의 눈에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