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귀환
그렇게 시선이 멈추면,
그제야 들리는 소리가 있고,
그제야 느껴지는 온도가 있고,
그제야 오래전부터 있었던 내 감각이 다시 말을 겁니다.
감각이 멀어졌던 시간들
요즘 따라, 생각조차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자신의 고민을 함께 생각해 달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으론 “물어보니까 성의만 보이자” 하고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행위 자체가 너무 버거워 도망치고 싶은 순간입니다.
그건 단순히 피곤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이미 지쳐 있는 상태,
감각과 인지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일터에선 자주 이런 순간을 만납니다.
말을 건네고,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에 참여는 했지만
무엇이 오고 갔는지 떠오르지 않고,
하루가 지나면 내가 거기에 있었는지조차 흐릿합니다.
요즘 조직이 감정의 중요성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정서적 공감, 피드백, 감정 노동이란 말이 일상처럼 쓰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조직이 감정과 감각을 ‘중요하지만 다루기 불편한 것’처럼 여깁니다. 알지만 말하지 않으려 하고, 드러나면 번거롭다고 느낍니다.
그 결과,
우리 스스로도 점점 신호를 외면하는 방식에 익숙해집니다.
불편함은 넘기고, 긴장은 눌러두고,
좋은 일 앞에서도
그 기쁨에 반응할 여유가 없거나,
설명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냥 “별일 아니야”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됐어” 하고 넘겨버립니다.
감각이 깨어날 만큼 내 안에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감각이 멀어지면, 우리는 결국 존재하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깥의 속도와 시선, 움직임을 따라 걸어왔습니다. 빠름을 조율하고, 리듬을 되찾으며, 멈춰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았습니다.
이제, 시선을 조금 안으로 돌려볼 차례입니다.
내 안에 어떤 감각이 살아 있는지,
그 감각은 어떤 질문을 데려오는지.
걸음은 멈췄지만, 나의 여정은 더 깊어집니다.
존재를 느끼는 첫 번째 신호
감각은 몸과 마음이 보내는 첫 번째 신호입니다.
그 신호를 놓치면,
피로도, 여유도, 서운함도, 고마움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배경처럼 희미해집니다.
감각에서 멀어졌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조용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내 안의 소리를 놓쳤다는 뜻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느라,
정작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관찰하지 못한 채
그저 반응하고, 보고하고, 맞추며 버텨왔습니다.
조직이 정한 기준과 분위기에 맞추다 보면
언젠가부터는 ‘이 정도는 참는 게 당연하지’라는 주문으로
내 몸과 마음의 신호를 간과하게 됩니다.
실은 무거웠고, 서운했고, 막막했지만,
그때마다 “그럴 수도 있지”, “일이니까” 하고 지나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감각은 단순한 느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감각은 감정의 문입니다.
감각이 닫히면, 감정도 흐릿해집니다.
감정을 회복하고 싶다면,
먼저 감각을 다시 열어야 합니다.
이는 감정을 참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 몸이 먼저 자각하고 보낸 신호를,
알면서도 넘기기 시작한 감각의 문제입니다.
회복과 확장, 감각이 돌아오고 열리는 시간
감각이 다시 돌아오면 어떤 기분일까요?
의외로 극적인 변화도, 특별한 깨달음도 아니었습니다.
지나가던 햇빛이 평소보다 따뜻하게 느껴진 순간,
손에 쥔 커피의 온기가 조금 더 오래 머물렀던 순간,
그저 그런 소소한 순간들이었습니다.
연세대 김주환 교수는 이런 몸의 작은 신호를 ‘고유감각(interoception)’이라고 말합니다. 고유감각이란, 몸 내부의 미세한 신호를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이 감각이 발달할수록, 사람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더 정확히 알게 됩니다.
그 작은 감각들을 다시 느끼기 시작한 후부터, 나는 비로소 내 몸과 마음의 상태를 선명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몸의 신호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쳤던 것입니다.
지바 마사야는 『센스의 철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센스란 외부를 감지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힘입니다. 센스를 잃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의 연결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회복된 감각은 천천히 세상을 향해 문을 엽니다.
빠르게 걷기만 하다가, 잠시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벤치에 앉아 오래 풍경을 바라보는 날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평소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어떤 감각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천천히 알게 됐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을 받아들이는 나의 감각이
더 섬세하게 열렸다는 것을요.
소설가 김보영은 『다섯 번째 감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감각은 다섯 가지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직관이나 관계, 심지어 시간조차도 감각의 대상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각이 내 삶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는 점입니다."
감각이 확장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좁은 시야로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답이라고 믿었던 목표, 빠르게 가야 한다고 믿었던 속도, 그 모든 것이 ‘내가 아닌 누군가의 감각’에 맞춰져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감각은 단지 피부로 느끼는 온도, 눈에 들어오는 빛, 손끝에 닿는 질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감각을 오감 너머로 확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는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다섯 가지 감각 외에도, 자신의 몸을 느끼는 감각, 내면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감각, 타인과 연결되는 감각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12 감각_루돌프 슈타이너 인지학 입문』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감 외에도 인간에게는 미세한 내면 감각이 존재합니다. 이 감각들이 열릴수록, 우리는 더 깊은 내적 성찰과 자기 이해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우리는 ‘생명감각’, ‘자기 움직임감각’, ‘사고감각’처럼 존재의 상태를 섬세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타고납니다. 하지만 이 감각들은 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무시되거나 억눌리면 쉽게 닫히고 맙니다. 결국 감각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회복하는 첫 번째 문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무엇에 긴장했고, 무엇에 감동했는지를 알아차리는 힘은 오직 내면에서 깨어나는 감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니까요.
이제는 압니다.
감각은 회복될 수 있고, 확장될 수도 있습니다.
그 감각을 다시 만나고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으로 바뀐다는 것을요.
여러분은 평소 어떤 감각을 외면하며 살았나요?
그 감각에 다시 귀 기울이기 위해, 나에게 어떤 시간을 허락하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