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카톡이 친구들의 생일을 알려준다. 카톡에 등록된 친구가 618명. 이 중 수시로 대화하는 사람이래 봤자 50명 미만이고, 그 외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1년에 단 한 번의 톡을 하지 않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그걸 알리 없는 카톡은 매일 아침 생일인 사람들의 이름을 나의 프로필 바로 아래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려놓고 그 옆에 선물하기 아이콘을 붙여놓았다. 하트가 붙은 작은 상자가 앙증맞은 모습으로 나를 응시한다. 선물을 하나 보내? 말아? 커피? 케잌? 아님 아이스크림?
문제는 선물하기의 기준이다. 그날 아침 생일인 사람들의 이름을 보곤 가만히 그와 나와의 거리를 따져본다. 선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내적 갈등의 원인을 고민해본 결과 나의 판단 기준이 매우 이기적인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기준이란 일단 나에게 선물을 해 준 적이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나의 일이나 평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인가? 였고, 그 기준에 예스!라는 결론이 나오면 편하게 몇 번의 터치로 선물을 구입하고, 간단한 메시지를 적어 축하의 소임을 다했다. 메시지 카드의 글자수 한계가 고맙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나이 먹을수록 생일이 대수롭지 않다고, 그래서 본인도 잊고 있는데, 카톡이나 페북이 알려주는 바람에 상기하게 됐다고.
그러나 나는 나이 먹을수록 생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중요한 일까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바득 바득 살아가는 우리가 일 년 중 단 하루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평가나 성과 없이 오로지 존재만으로 축하받을 수 있는 날은 생일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부터라도 생일인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고 안보내고의 여부를 떠나서 축하의 메시지를 전해보아야 겠다. 진심을 담아 또박또박 타이핑한 메시지로 '태어남을 축하한다고, 결코 쉽지 않은 세상살이지만 그대의 존재 덕분에 행복해할 많은 사람들이 있는것 만으로도 태어난 이유는 충분하다고'
그리고 또 하나! 이제 나는 내 생일에 그 누구의 축하보다도 내 스스로의 축하를 받기로 했다.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계획하고, 특별한 무언가를 해볼 생각이다. 온 마음을 다해 나의 존재에 대해 감사하고, 진심어린 축하의 말을 전할것이다. 매년 무엇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 일로 매 년 나의 생일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될것이다.
평상시 습관처럼 나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마시던 커피를 줄이고, 학습의 게으름에 대한 심적 보상의 수단이었던 책 사는 일도 좀 줄이고, 게으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택시비들을 모아서 혼자만의 생일 파티를 열어야겠다. 꼭 혼자가 아니어도 좋다. 그 순간을 함께 나누고픈 한 둘이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아! 카톡이 알려주는 오늘의 생일자는 시형님이다. 오늘이 딱 31분 남았다. 너무 늦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