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이란, 언젠가 사라질 줄 알면서도 나답게 온 마음을 내어 준 한 순간 일지도 모르겠다.
해 질 녘이 되자 낮은 불빛이 고즈넉이 번져갔다. 지붕과 산자락 위에 한동안 머물던 석양은 하루의 끝을 알리듯 부드러운 금빛과 따스한 주황빛의 여운을 남겼다. 나는 아스라이 사라지는 이 순간을 좋아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 삶에 잠시 들렀다 가는 한 명의 여행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삶에 끝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더 다정하게 만든다.
떠나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온 마음을 건네보는 연습을 한다. 아마도 삶은 얼마나 오래 머물렀느냐가 아니라, 그 한정된 시간 안에서 얼마나 깨어 있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머물렀는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은 나를 한자리에 깊이 머무를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종종 빛이 창가에 머물다 천천히 자리를 옮기는 모습을 바라본다. 마음의 고요가 찾아들면,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몸의 고통은 잠시 멀어지고, 장면 하나하나가 선명하고도 느릿느릿 흘러갔다.
신기하게도 그 한순간엔 온전히 내가 스며들어 대상과 하나가 되곤 했다. 마치 내가 지나가는 구름이 되고, 하늘이 되고, 저 너머 지나가는 작은 새가 되어가는 것처럼. 그동안에는 ‘나’라는 이름도, 아픈 몸도, 걱정도 희미해졌다. 앞으로의 시간과 지나온 날들의 무게도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음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빛처럼 조건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삶 안에 놓여 있었다.
건강할 때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굳이 바라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아픈 몸으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던 삶의 조각들이 때로는 감사함으로 다가왔다. 몸이 덜 아픈 날,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하루가 오면 그 자체로 경이로운 선물처럼 느껴졌다.
투병 중에도 내가 오롯이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작은 일상들이 여전히 많았다. 침대 옆 간이 테이블에 앉아 좋아하는 펜으로 일기장에 글을 쓰는 일, 한 숟가락의 음식을 오롯이 꼭꼭 씹어 넘기는 일, 아침마다 세수를 하고 거울 속의 나에게 따뜻한 시선을 마주하는 일 등, 나를 위한 작은 움직임들을 해낼 때마다 스스로를 기꺼이 격려하였다. 그 사소한 마음들이 모여 나에게 하루를 살아갈 단단한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예전처럼 자유롭지도, 몸이 편안하지도 않은데 이상하게도 삶은 지금의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삶은 고통이 사라질 때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보다 더 큰 무엇에 의해 이어지고 있었다. 그 감각 속에서 나는 아프기 전보다 이상하게도, 더 깊은 행복을 느꼈다. 행복은 갑자기 찾아오는 기쁨이 아니라, 이 순간에 조금 더 머무르게 하는 깊은 힘과 같았다.
그렇게 작은 일상들을 하나씩 살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저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때론, 그런 깨달음조차 무색할 만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날들도 찾아왔다. 숨 쉬기조차 버거운 날, 고요히 눈을 감고 내 숨에 집중했다. 나는 통증과 내 안의 모든 것을 기꺼이 마주 보았다.
'괜찮아, 이 모든 것이 지금의 나인 걸. 나와 함께 있으니 안심해도 돼.' 나는숨을 길게 내쉰 뒤, 그 말을 가슴에 건넸다. 그리고 내 안에서 아직 꺼내지 못한 목소리가 있는지 가만히 귀 기울인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 깊은 곳에서 움츠렸던 한 존재가 고개를 들었다.
'나, 또 아프면 어쩌지…? '
그 작은 목소리가 전해지는 순간, 가슴 한편이 시큰해졌다. 아아, 그랬구나. 또 아플까 봐 얼마나 많이 무서웠을까. 그동안 밝은 얼굴로 애써 담담하게 버텨내려 했던 나를 돌아본다. 나는 내 가슴에 손을 도닥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픈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아파도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온전하게 너와 함께 있을 거야.
그 말이 마음에 닿자,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세워 두었던 경계들도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제야 나는 안전감을 느꼈는지, 마음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 진짜 두려움이 모습을 드러냈다. 떨리는 내면의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나, 지금 아픈 건 견딜 수 있는데..
이렇게 계속 아파서… 혹시 버림받으면 어쩌지..?'
작고 외로운 그 질문에, 가슴이 저려왔다. 아프다는 이유로, 나약하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홀로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어린아이 같은 막연한 공포. 나는 두 팔로 나 자신을 힘껏 끌어안았다. 마치 아픈 아이를 감싸 안듯, 내 안의 울고 있는 나를 따뜻하게 안고 한동안 엉엉 울었다. 뜨거운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 나의 아픈 모든 순간을, 내 삶의 한 부분으로 기꺼이 품어 안겠다 다짐했다. 아프다고 해서, 약해졌다고 해서 나를 밀어내지 않겠다고. 그 순간 따뜻한 안도감과 다정한 위로가 스며들었다.
나는 더 건강해야만, 무언갈 잘해야만 머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이 삶 속에 있었다. 나는 약해진 그 마음을 현재로 데려왔다. 지금 이 몸으로, 지금 사랑 속의 나로. 그제야 두려움은 천천히 물러났다.
나는 이 순간, 온전함이란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의 나도 그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미 큰 사랑 속에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사실 버림받을까 봐 무섭다는 감정은 특정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두려움이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모습이라도 나라는 존재가 변함없이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근원적 불안이었다.
아프면 사랑받지 못할까 봐. 약해지면 쓸모없는 존재가 될까 봐.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면, 나조차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어쩌면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런 나를 내가 외면하게 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감정은 내 마음이 지금 어떤 결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작은 창이다. 그 뿌리는 언제나 사랑이다. 두려움은 잃을까 봐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고, 분노는 상처받은 곳을 보호하려는 신호였으며, 슬픔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영혼의 울림이다. 그것은 불완전함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아주 귀한 경험이다.
내게 찾아온 암 투병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을 더 선명하게 살아보라고 건네진 선물 같았다. 삶이 영원하다는 착각을 내려놓게 하고, 미루지 말아야 할 사랑과 생생한 감각들을 자꾸만 지금 여기로 불러낸다.
암은 나에게 무엇을 이루었는지, 무엇을 가졌었는지 묻지 않는다. 대신 나에게 질문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온전한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 "
항암 치료의 힘겨운 순간마다, 때로 길을 잃은 듯한 불안한 나날 속에서도 내 안 어딘가에서는 그 고통보다 더 큰 무엇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어쩌면 나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이 삶에 온 것이 아니라,
이 몸으로 숨 쉬고, 흔들리고, 아파하고,
그럼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이 경이로움을 경험해 보기 위해 이곳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