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죽어도 미련이 없을 삶

Interactive Media Design 2 | 4주 차 글쓰기

by 윤달청





'언제 죽어도 미련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은 과연 진실일까 거짓일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죽은 뒤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을 텐데, 미련이 있고 없고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사람은 갈대 같아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불과 10분 전에 내뱉은 말과도 완전히 다른 말을 할 수 있다. '과연 내가 옳고 그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잘못을 하면 수치스러울 줄을 알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 한동안 떵떵거리며 살다가도 한순간 벼랑 끝에 몰리기도 하는 게 삶이다. 그러니 죄책감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에게 '너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하거나, 세상이 모두 자기를 위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만한 사람에게 '언제까지 세상이 네 편일 거라고 생각하냐'는 등의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간절히 삶을 열망하다가도, 때로는 내가 원해서 태어난 삶도 아닌데 살아야 한다는 게 억울하기도 했다. 도저히 쉴 수 있는 여유가 없다고 느낄 때엔 안 그래도 힘든 상황에 아프고 싶지 않았다가 동시에 아프고 싶었다. 쓰러지면 병원 침대에서라도 며칠 동안 누워서 쉴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얄팍하게 좋은 쪽만 바라보니 할 수 있던 방자한 생각이었다.




'언제 죽어도 미련이 없을 삶'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 누구도 거꾸로 방향을 거슬러 갈 수 없는 마라톤이다. 미련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사실 삶이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나 또한 그러하니까.



보잘것없는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내 삶에 소중한 기억은 무척이나 많다는 걸 이때쯤 곱씹어본다.


그땐 잘못인 줄 몰랐던 어린 시절,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산 병아리를 소중하게 보살폈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병아리 똥 냄새가 매우 고약하다는 사실을 덕분에 알게 되었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몸소 소중한 생명의 무게를 느꼈다. 애초에 오래 살 수가 없는 병든 새끼들을 아이들 상대로 장사한 거라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소문을 들은 건 먼 훗날이었다.


그것보다도 더 어린 시절엔 새벽 6시에 일어나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목욕탕에 갔던 기억도 떠오른다. 개운하게 씻고 나온 다음, 할머니께선 바나나우유 대신 요구르트에 노란색 빨대를 꽂아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할머니는 바나나우유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위해 냉장고에 늘 요구르트를 넣어 두셨다. 이젠 예전처럼 요구르트를 자주 마시지 않지만, 가끔 할머니와 함께 목욕탕에서 씻고 나와 요구르트를 마시며 아침 해를 맞이했던 날들이 그립다.


벌써 두 개의 기억만 말해도 글이 이만큼 길어지는데, 이렇게 좋았던 기억들이 자주 꺼내주지 않으면 또 모래밭 속 조개처럼 금방 파묻히고 만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거나, 본인이 오래 살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그 말들은, 음절 단위로 계속 내 가슴을 쿡쿡 찌른다.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오래 살 수도 있을 거예요. 살다 보면 즐겁고 좋은 날들이 또 얼마나 많을 텐데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턱 끝까지 올라와 텁텁해지는데 차마 뱉어낼 수 없다.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 현실적인 성격이 이럴 땐 참 미어진다. 하지만 그도 그럴게, 내가 그들의 삶을 책임져줄 만큼의 능력도 없는 상황에서 감히 내뱉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한 발언이지 않나.


그럼에도 동시에 바라고 싶다. 그들이 살기 좋은,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그런 좋은 세상이 오기를. 진정으로 그런 세상을 바라기 때문에 더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세상의 변화에 귀 기울이게 되는 듯하다. 눈 깜짝할 새 지나가버린 지난 하루도 얼마나 값졌는지, 쉽게 망각하지 않도록 늘 되새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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