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버시 중시 문화가 생각보다 강하다
두 번째 놀란 사실: 프라이버시중시문화가 생각보다 강하다
일본의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문화는 예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이 디지털 사회에서 앞서 가지 못한 이유 중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으나, 프라이버시 중시 문화도 일부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일본은 국민 개개인의 마이넘버(한국의 주민등록번호)만으로는 은행 업무, 의료 보험 업무, 민원서류 발급 업무, 세금 납부 및 연금 수령 등을 수행할 수 없다. 데이터베이스 간 연동이 부족하고, 공기관과 민간기업 간의 데이터 공유도 자유롭지 않다. 이는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책적인 문제라고 알려져 있다. 나는 여기에 더하여 일본의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문화가 그 배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일본은 오랫동안 국민 개개인에게 번호를 부여하여 관리되는 것에 대한 강한 저항감이 있어 왔다. 이 번호로 인해 국가가 개개인의 권리와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는 국민의 두려움이 컸던 것이다. 한국이 편리함을 먼저 생각하여 주민등록번호와 주민등록증을 1968년부터 빠르게 도입했고 이것이 각 데이터베이스를 통합하는 데 일조하였다면, 일본은 프라이버시를 우선시하여 디지털 사회를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다행히(?) 2000년대에는 수 천명의 연금 기록이 누구 것인지 알 수 없게 되면서, 2007년에는 마이넘버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12자리 번호는 국민 개개인과 외국인에게 부여되었지만, 해당 번호를 활용하는 마이넘버카드 발급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어 아직까지 이 카드를 발급받지 않은 사람이 20% 이상이다. 이는 프라이버시 중시 문화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일본대학에 처음 갔을 때, 이러한 프라이버시 중시 문화가 대학 사회에서도 예상보다 강하게 느껴져 처음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명함에 팩스 번호가 있고, 개인 핸드폰 번호는 없다
일본대학에 출근한 첫 주, 명함을 만드려고 주변 동료들의 여러 명함들을 샘플로 받아 보고, 한국의 명함과는 다른 놀라운 차이점을 보았다. 사실 명함에 넣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려는 것보다 디자인을 보려던 것이었는 데, 의외로 명함에 적어 넣는 내용이 한국과는 다른 것을 본 것이다. 한국에서 만들었던 명함에는 대학의 이름과 로고, 대학 주소, 내 이메일과 연구실 전화번호, 그리고 개인 핸드폰 번호, 개인 홈페이지에다가 페이스북 아이디 등까지 들어가 있었다. 일본 동료 교수들의 명함에도 유사하게 대학의 이름과 로고, 대학 주소, 자신의 이메일과 연구실 전화번호가 있었다. 그런데 팩스 번호가 모든 명함에 들어 있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팩스라는 기계를 주변에서 보기 힘든 때였기 때문에 이 팩스 번호가 모든 명함에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데, 한국 명함에는 꼭 있는 개인 핸드폰 번호는 일본 명함들에서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가 하고 일본의 여러 대학에 흩어져 있는 젊은 일본 교수들의 명함을 받아 보았다. 그간 팩스 번호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표기가 되어 있는 명함이 있었다. 몇몇 명함에는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등의 아이디가 들어 있었고, 자신의 사진을 넣은 것도 한 두 개 있었다. 그러나, 개인 핸드폰 번호는 여전히 어떤 명함에도 없었다.
명함은 초면인 상대방에게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알리는 일종의 소개장이다. 일본 사회의 명함에 개인 핸드폰 번호가 없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에 대한 일부 정보를 통제하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에 팩스 번호가 있는 것은 일본에서는 아직도 팩스가 일부 중요한 연락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팩스는 한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봐도 될 정도로 자리를 잃었지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공문이나 서명 등과 같은 공식적인 문서를 주고받을 때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본 명함에는 개인 핸드폰 번호 대신 팩스 번호가 들어 있는 것이다.
회의나 학회, 행사 등이 있을 때면 명함을 꼭 챙겨야 한다. 이러한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명함을 주고받는 것이 일본에서의 관례이다. 이는 한국도 유사하긴 하지만, 일본에서 명함을 주고받는 경우가 더 빈번하며, 명함을 받는 문화도 좀 더 형식적이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시간을 들여 읽어보고 명함에 있는 정보에 대하여 간단한 질문이나 코멘트 (예를 들어,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분의 명함을 받았을 때, ‘아, AI 시대에 꼭 필요한 전공이네요’)를 하는 것이 예의이다. 무심코 그냥 핸드백이나 주머니에 넣어 버리면 무례하게 여겨진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일한 한 인류학자 (Polleri, M. (2017). Exchanging business cards in Japan. Anthropology Today. https://www.academia.edu/33581222/Exchanging_Business_Cards_in_Japan_Oh_So_you_are_an_)는 일본에서 명함을 주고받는 문화를 설명하면서, 9x5 센티미터의 작은 명함에는 개인이 공적으로 자신 (purblic persona)을 보여주려고 할 때의 주요한 측면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대학의 명함에서는 이름, 소속, 소속 기관의 연락처들은 물론 개인적인 정보 (핸드폰 번호 등)와 그 외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까지를 넣어 공적인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일본대학의 명함을 보면, 이름과 소속, 소속대학에서 사용되는 연락처만이 나타나 있어서 이 정보들이면 공적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면이 엿보인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 사회의 강한 프라이버시 중시 문화가 작은 명함 속에서도 발견된다.
보통 커뮤니케이션은 이메일로, 친구들과는 라인으로
첫 학기, 같은 전공에 속한 교수의 명함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핸드폰 번호를 알려고 물어보았으나 용건이 있으면 이 메일로 보내라는 말과 함께 단번에 거절당해서 당황한 적이 있다. 나중에 친분이 쌓인 후 핸드폰 번호를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내가 뭔가 기분 나쁘게 한 줄 알았다. 그 이후 자주 연락해야 하는 일본 지도학생에게 핸드폰 번호를 물었다가 왜 이메일로는 연락이 어렵냐고 반문을 받아 또 한 번 당황한 적이 있다. 결국 이 지도학생으로부터는 졸업할 때까지 핸드폰 번호를 받지 못하였다. 내가 이 당시 알지 못하였던 것은, 개인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는 것은 내가 소통을 하는 데 있어서는 편리하긴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이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을 무시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프라이버시 중시 문화에서는 개인 핸드폰 번호는 개인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정보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과 쉽게 공유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일과 개인 생활을 엄격하게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어, 일본 대학의 교수들은 학문적인 활동이나 학회에서 만나서 얘기할 때에도 개인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일본대학에서의 핵심적인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이메일이다. 여기에 더하여 라인 (카카오톡과 유사한 모바일 메신저)을 개인 간 커뮤니케이션이나 단체 채팅을 위하여 많이 사용한다. 대부분 학생들은 그룹 과제를 위하여 즉시 라인의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이용하다가 끝나면 없앤다. 물론 친한 친구들과의 채팅방은 지속할 것이다. 교수들인 경우에도 공동 연구들이 있을 때는 라인 채팅방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리 흔하지는 않고, 주로 친한 친구들을 위주로 만들어진다. 이 라인은 카카오톡과는 달리 QR 코드로 상대방을 등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핸드폰 번호를 알 필요가 없다. 또 하나 특성은 카카오톡에서는 초대자가 채팅방을 만들고 초대할 사람을 선택하면 바로 단체 채팅방이 만들어지는 반면, 라인에서는 초대를 받고 나서 초대받는 사람이 수락을 해야만 단체 채팅방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에서 라인이 널리 활용되게 된 데는 이러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한 특성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같은 직장 동료, 모임 동료, 지역 주민들의 핸드폰 번호를 리스트로 만들어 서로 다 공유하고, 카카오 톡으로 연결하여 개인 간, 혹은 그룹 간 커뮤니케이션을 아주 편리하게 한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모바일이나 카카오톡으로 한다. 더 나아가 이제 카카오톡은 공공기관이 국민과 소통하고, 은행이나 기업이 소비자와 소통하는 국민적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되었다.
반면, 일본대학에서는 개인 핸드폰 번호 리스트를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마 다른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같은 학과 동료 교수나 지도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개인 핸드폰 번호를 아는 경우는 드물다. 이렇듯 개인 핸드폰 번호를 모르기 때문에 음성이나 영상 전화, 혹은 문자로 대학의 동료나 학생들과 소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나의 경우, 일본대학 동료들 중 핸드폰 번호를 공유한 것은 아주 친한 몇몇 동료들뿐이다. 모바일 번호 등 사적인 정보는 아주 가까운 친구들이나 가족들 외에는 공개하지 않는 문화가 일본 전체사회는 물론, 대학에도 깊게 뿌리내려 있다는 것이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위 명함 이야기에서 본 대로, 핸드폰 번호는 극히 사적인 정보라고 인식되어 대학에서도 교수들의 핸드폰 번호를 수집할 때는 어디에 사용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사전에 동의를 받는다. 예를 들어, 대학 입시 기간 중에는 급한 연락을 할 경우를 대비하여 개인 핸드폰 정보를 수집하는데, 매년 다시 동의를 얻어 재수집하여 사용한다. 학생이나 졸업생의 전화번호를 안다고 해도, 처음 수집 당시 동의한 일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 이는 대학에서 다루는 개인 정보를 보호하는 정책이 상세히 규정되어 있고, 엄격히 집행되기 때문일 것이다.
교수가 학생의 개인 정보를 알아내기는 하늘의 별따기
일본대학에서 교수가 학생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고 대학 행정부서를 통하여 그 학생의 개인 정보를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나의 경험을 예로 들어보자. 대학 행정 부서로부터 나의 학부 지도학생이 학칙을 위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급히 학생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상담 일정을 잡고자 하였으나 학생이 내가 보낸 여러 번의 이메일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대학 행정 부서에 이 학생의 핸드폰 번호를 요청하였으나, 담당 직원이 개인 정보라 본인 동의 없이 줄 수 없다고 하면서 몇 번 미안하다고 하였다. 나도 캠퍼스 내의 교원 주택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캠퍼스 내 이 학생이 살고 있는 기숙사를 찾아가려고 어느 동인지만 알려 달라고 해도 같은 답변이었다. 결국 여기저기 비공식적인 루트로 수소문하여 이 학생의 친구를 찾아 기숙사 위치를 알아내서 학생을 만날 수 있었다. 몇 년 전의 일이었지만 현재에도 학생이나 교수 개인 정보는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어찌 보면 내 개인 정보가 그만큼 보호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어찌 보면 조금의 융통성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교육 자료를 개인적인 정보 자산으로 보는 시각
일본대학들은 각종 교육 자료 공개와 공유에 적극적이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교수들이 자신이 개발한 교육 자료들까지 개인이 가진 정보의 범주로 보는 시각 때문일 수 있겠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2013년에 실시한 일본과 미국 교수들의 유튜브 비디오를 활용 및 공유 여부를 비교한 공동 연구가 있다. 유튜브의 교육 콘텐츠를 강의에 활용하고 있느냐의 질문에 미국 교수들의 65% 정도, 일본 교수들은 53% 정도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유튜브의 온라인 자료를 사용하는 비율에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 대학 교수들도 활발히 온라인의 공개된 자료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교육 콘텐츠를 유튜브에 업로드하느냐는 질문에는 미국 교수들의 약 35%가 그렇다고 대답한 반면, 일본 교수들 중에는 누구도 업로드하고 있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일본 교수들의 경우 자신의 강의 등을 비디오로 제작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둘째는 제작하였더라도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 외에는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코비드 이후에 같은 연구를 한다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나, 자신이 만든 자료를 개인 정보의 한 범주로 보는 시각이 있는 한 결과에 큰 변화는 기대되지 않는다.
자료 공개를 꺼리는 일본 대학의 문화는 다른 예에서도 볼 수 있다. 미국 MIT는 2001년에 MIT Open CourseWare를 설립하여 MIT 대학의 모든 강의 자료들 – 강의 계획서에서부터 강의오디오나 비디오, 프레젠테이션 자료, 시험 문제 등 -을 공개하기로 하였다. 이 MIT Open CourseWare를 모델로 삼아, 2005년에 일본의 선도적인 몇몇 교수들이 일본오픈코스웨어 (Japan Open CourseWare 혹은 JOCW) 컨소시엄을 발족, 회원 대학들의 강의 자료의 개발과 공유를 적극 격려하고 홍보하였다. 초기 정회원으로 오사카 대학, 교토 대학, 게이오 대학, 도쿄 공업 대학, 도쿄 대학, 와세다 대학 등 6개 대학이 참가하였으며 이는 일본 사회의 큰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18년 이상이 지난 2023년에도 참여 대학의 숫자만 보면 거의 제자리걸음이라는 느낌이 드는 수준이다. 2023년 웹사이트를 보면, 2020년 컨소시엄명을 일본공개교육 (Open Education Japan 혹은 OE Japan - https://oe-japan.netlify.app/ )으로 바꾸어 좀 더 넓게 공개교육을 정의했으나 실망스럽게도 700여 개가 넘는 일본의 대학들 중에서 오직 13개 대학만이 정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준회원으로 3개의 비영리 기관, 후원회원으로 6개 기업만이 웹사이트에 열거되어 있다.
일본의 타케다교수 (http://hdl.handle.net/10236/12065)는 이렇게 일본 대학들이 자료를 공개하고 공유하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일본 대학의 폐쇄적인 문화 때문이라고 비판하면서 세계화 시대, 디지털 시대에는 고등교육에의 개방성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방화되고 세계화되어 가는 요즈음, 개인이 연구를 통하여 창조한 지식들은 물론, 강의 자료 등 각종 교육 자료들은 프라이빗한 정보라기보다는 공공의 정보, 공공의 재산일 수 있다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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