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벽돌집의 로망
"허허. 특이한 로망이네요. 빨간 벽돌집은 대체로 '낡은 집'이라는 건데...."
네 살 때부터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았던 내 눈에는 층이 낮은 빌라가 안정감 있어 보였다. 부모님 또래인 부동산 소장님들이 속으로 얼마나 혀를 찼을까.
2018년, 신혼집을 구하러 다니던 어느 날 부모님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근처 부동산에서 빌라 전세 매물을 보게 됐고 첫눈에 마음에 쏙 들었다. 기존에 그 집에 살고 있던 엄마 또래의 세입자는 인적이 드문 동네에 제 발로 찾아온 나를 반색했다.
"이 집이 터가 좋아. 내가 장담해요! 우리 딸이 아기가 안 생겨서 마음고생을 했는데 이 집에 들어와서 살면서 아들도 낳았다니까."
어수선한 가운데 그 집은 우리의 첫 신혼집이 되었다.
결혼식은 9월이었지만 5월에 미리 전세 계약을 하고 집에 어울리는 가구를 하나 둘 들였다. 엄마와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최대 8인까지 앉을 수 있는 넉넉한 원목식탁, 날씬한 우리 둘이 대자로 뻗어 잘 수는 킹 사이즈 침대, 폭이 깊은 예쁜 색깔의 소파'와 같은 또 다른 나의 로망을 차근차근 채워갔다. 넓게 빠진 30평대의 빌라라서 8인용 식탁과 킹 사이즈 침대, 4인용 소파를 들여도 허전해 보일 만큼 공간이 남았다.
가구가 하나씩 들어오는 걸 보며 옆집 아줌마는 젊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후미진 동네에 왔냐고 말했지만, 로망실현에 푹 빠진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벽지는 깨끗한 편이었지만 평소에 남이 입던 옷을 얻어 입는 것도 질색하시는 시어머니는 벽지라도 새것으로 바꾸면 좋겠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권유'인 줄 알았는데 다섯 번쯤 벽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무'라는 걸 깨닫고 남의 집 벽지를 새로 발랐다. 그것도 실크 벽지로. 이미 큰 가구가 어느 정도 들어온 상태라서 보양작업을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래도 벽지를 새로 하고 보니 확실히 깨끗하고 포근했다.
'그래, 어차피 4년은 살 거니까. 잘됐지 뭐.'
벽지뿐만 아니라 화장실 2개의 누런 색의 세면대와 욕조를 사포질 하고 하얗게 코팅했고, 콘센트도 새 걸로 바꿨다. 방마다 오래된 등이 침침하게 끔뻑거려서 LED 조명으로 싹 교체했다. 사실 처음 계약할 때부터 벽지와 조명 교체는 임대인에게 요청해 보았지만 그는 눈도 꿈쩍 않고 거절했다. 전세금을 1천만 원 깎아준 것이라고 하니 그럴 수 있겠다며 수긍했다.
임대인은 신혼부부가 입주한다고 하니 내심 좋아했다. 우리는 임대인의 기대에 부응하듯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집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닦고 칠했다. 자취해 본 적도 없는 나는 처음 내 공간을 갖는 기쁨에 살림꾼을 자처했다.
그렇게 신혼집 꾸미기 놀이에 푹 빠져 두어 달을 보냈고 드디어 우리의 첫 번째 '홈 스위트 홈'이 완성되었다. 거실에 앉아 아늑하게 꾸민 집을 둘러보면 마음이 편안했다. 우리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벅찼다.
집 꾸미기를 마무리하고 친구들과의 집들이를 하루 앞두고 있던 날이었다. 나는 집들이 준비를 위해 차를 타고 마트에 다녀왔다. 남동향 집 거실에도 어둠이 내려앉은 느지막한 오후였다. '홈 스위트 홈'을 외치며 중문을 열고 주방으로 걸어가는데 '참방'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양말이 뜨끈하게 젖는 느낌이 났다.
서둘러 벽을 더듬어 불을 켰고 너무 놀라 '악' 소리도 나오지 않는 광경을 마주했다.
우리의 스위트홈 주방부터 거실, 안방까지 기름 둥둥 뜬 뜨끈한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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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집(빌라)에 살며 좋았던 점
1. 네 동의 빌라가 단지를 이루고 있어서 아늑함
2.세대마다 지정 주차 1대씩 가능
3. 방 3 화장실 2, 주방과 거실이 확실히 구분된 구조
4. 빌라라서 평수보다 집이 더 넓게 빠짐
5. 산과 밭이 있는 동네라 한적하고 조용함
살아보니 불편했던 점
1. 경비실, 관리실 없음
2. 세대마다 돌아가며 분리수거 거치대를 설치하고 수거해야 하는 문화
3. 고립된 동네라 걸어서 나갈만한 곳이 없음 (상가, 공원 없음)
4. 역시 고립된 동네라 퇴거할 때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