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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윤 Jun 19. 2024

객기 혹은 용기

D-day...



그저 때가 되었을 뿐.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한창 일하는 중에 회사 메신저가 울리고 파일 하나가 툭 올라온다.


'3시까지 보고서 제출바람.'

'뭔 소리야 또. 무슨 보고서? 지금 2시 반인데?'


적응이 안 된다. 난 왜 다른 직원들처럼 ‘오케이. 원한다면 해드립죠. 그까짓 거.' 혹은 묻고 따지지도 않고 '넵. 알겠습니다.'가 안 되는 걸까?


보고서를 작성하는 건 단련된 일이니 어려울 것도 없다. 다만 누구에게 어떤 의도로 보고될지도 모른 채, 나에게 할당된 빈칸을 채우는 무의미한 작업을 견디기가 힘들다. 회사에서 직원을 뽑을 때 강조하는 '주체성과 창의성'은 일하는 데 있어서 방해요인일 뿐이다. 회사가 나에게 요구하는 건 '수동성과 충성심'이니까.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지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보고를 위한 보고서'가 필요했을 터. '자세한 건 궁금해하지 말고 그냥 내 손과 발이 되어줘. 내가 원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내게 필요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줘.' 회사가 나에게 많은 걸 바란 건 아니지만 그런 회사의 태도가 오히려 나를 지치게 했다.





오늘이 사직서를 제출하는 날이 될 줄이야. 출근할 때만 해도 오늘 퇴사선언 하려는 계획은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모든 건 핑계에 불과했다. 다만 때가 되었을 뿐.


가진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시뮬레이션은 이미 여러 차례 돌려보았다. 염치없지만 지금처럼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걸 전제로 하면, 3년쯤은 일을 안 해도 혼자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 굶어 죽기야 하겠어?'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지만 나라는 인간이 숨만 쉬며 존재하기 위해서도 꽤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신용을 보장해 줄 회사가 사라지니 정부도, 은행도, 보험회사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퉁명스러워진 듯했다. '너 뭐 돼?'


회사라는 껍데기를 벗고 나니 민달팽이가 된 기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무지하고 회사 울타리 안에서 누리던 특권을 우습게 알았던, 철없는 달팽이의 객기 넘치는 퇴사였다.


나는 용감한 달팽이야. (출처. Unsplash)



아직까지는 회사라는 존재를 등에 업은 집달팽이였던 나는 용기로 가득 차있었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 나 이렇게 살면 후회할 것 같아. 정해진 계획은 없지만 천천히 고민해보고 싶어.'


허락을 구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상 통보에 가까웠다. '동의안 함'이라는 선택지가 없는 설문 같은 거랄까. 사회인이 되기까지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신 부모님을 위해 최소한 '퇴사 전 알람'은 전하자는 마음이었다. 매일 퇴근하고 돌아오는 내 표정을 보고 부모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아빠와 둘이 식탁에 앉아있는데 아빠가 흘러가듯 물었다.


"서윤아 너는 회사 가는 게 재미없니?"

"응. 아침마다 겨우 일어나.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야."

"정말이야? 허참.. 어떻게 매일을 그렇게 사니?"

"아빠는? 회사가 재밌어?"

"응. 아빠는 지금도 아침에 회사 가서 믹스커피 한잔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게 즐거워. 여력만 되면 80살 넘어서도 일하고 싶어."


서로를 놀라워하며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그게 전부였다. 부모님과 마주 앉아 퇴사계획,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무계획 퇴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문자를 보낸 지 십 분쯤 지났을까.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살도록 해.'


'세상에나. 이렇게 쿨하다고?' 초등학교 때 이후로 아빠가 오랜만에 멋있어 보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핸드폰 화면이 흐려졌다. 하긴, 아빠는 30대 초반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서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다. - 회사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못 견뎌서 때려치웠다고 한다. 피는 못 속이는 걸까. - 그렇게 자본도 백도 없이 사업을 시작하고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다가 IMF때 부도가 나서 아빠의 인생도 바닥을 쳤다. 그 후로 다시 한번 사업을 일으켜 우리 다섯 식구를 먹여 살렸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며 살아온 아빠에게는 나의 퇴사계획이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자.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참, 엄마에게는 미리 얘기하지 않았다. 아빠보다 현명하고 현실적인 엄마의 일리 있는 반대의견을 듣고 나면 고민만 길어질 게 뻔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엄마는 못내 서운한 눈빛이었다. 나는 '별수 없었다.'는 천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엄마의 아쉬움을 애써 모른 척했다. 엄마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침묵'으로 나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엄마의 서운한 눈빛 속에 5년 전 기뻐하던 엄마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대학교 4학년 막학기를 마치고 2011년 12월, 내가 지원한 회사의 최종합격 발표가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합격 확인 버튼을 눌렀다. 손이 덜덜 떨리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축하합니다. 최종합격 하셨습니다.'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온 세상의 빛이 나에게 쏟아지는 걸 느꼈다. '12월 운세에서 청룡이 하늘로 승천한다고 하더니.' 


"엄마! 나 최종합격했대!" 저녁 준비를 하다가 한달음에 달려온 엄마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호들갑 떨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봐." 본인의 눈으로 직접 '최종합격' 글씨를 확인하고 나서야 엄마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엄마와 나는 둘이 손을 맞잡고 소리 지르며 온 방안을 방방 뛰어다녔다. 늘 무뚝뚝했던 엄마가 그토록 크게 기뻐하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았다. 



딸의 무모함을 지켜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티도 못 내고 속으로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이제와 보니 나보다 부모님의 용기가 더 대단했다. 날 것 그대로의 세상에서 홀로서기하며 정처 없이 헤맬 때마다 스치듯 생각한다. '그때 엄마한테도 물어볼 걸 그랬나?'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빈틈없이 차근차근 흘러가지 않는다.



스물아홉,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던 걸까. 순식간에 회사에서 튕겨져 나왔다.


껍데기는 두고 갑니다. (출처. Unsplash)



수천 명을 뚫고 얻어낸 한 자리, 자랑스러운 회사와 직함이 적힌 명함, 신입사원의 당돌함을 뽐내며 찍은 사진이 새겨진 사원증, 내 책상, 지겹게 울리던 전화, 매일 나를 찾던 사람들. 5년 동안 타투처럼 내 삶에 새겨져 있던 것들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흔적 없이 지워졌다.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를 내려놓고, 나의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오직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객기가 아니었다. 나와 마주하고 진정한 삶을 살고자 선택한 용기였다.




매일 가야 할 회사도
매일 해야 할 일도
매일 만나야 할 사람도
출근도 퇴근도 없다.
하루 24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다.


야호.

이제 자유인가?

.
.
.
.
.




< 쿠키 글 >

날 것 그대로의 퇴사이유 (2016)



젊음을 잃지 않으려고

젊음을 돈보다 가치 있는 시간으로 채우려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죽은 젊음이 돼버릴까 두려워 그만두었다.


하루하루를 스스로 활용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일에 불평불만 하며 

그런 내 모습을 혐오하면서도 중단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상의 반복을 끊어내기 위해 그만두었다.


관심 없는 일에 하루를 온통 쏟으며

관심 많은 것처럼 거짓되게 포장하고

나의 행복에 도움 될 것 없는

그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그만두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행복을 느끼는 일,

타인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는 일, 

그리하여 다시 보람을 느끼고 꾸준히 노력할 수 있는

행복이 선순환되는 일이 있을 것을 믿는다.


그 일을 찾기 위해서는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줄 수 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하며

탐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의 일을 찾아

육체가 죽는 순간까지 노력하며

스스로 만족스러울 수 있는

그런 일생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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