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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윤 Jun 12. 2024

내 인생, 뭔가 잘못됐다.

나를 찾아줘. 프롤로그.




스물아홉, 익숙한 것과의 결별.



'1988년 7월, 영국 스코틀랜드 근해 북해유전에서 석유 시추선이 폭발하여 168명이 희생된 사고가 발생했다. 앤디 모칸은 지옥 같은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앤디 모칸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 순간 불타는 갑판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곧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행동은 ‘확실한 죽음 Certain Death’으로부터 ‘죽을지도 모르는 가능한 삶 Possible Death’으로의 선택이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2007.)





스물아홉, 대기업 5년 차. 모든 게 불확실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살다가는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책은 운명처럼 다가온다. 그 무렵 나에게 다가온 책은 고 구본형 선생님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불타는 갑판' 같은 삶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시커먼 바다로 뛰어내리는 것이다. 살지 죽을지 그 무엇도 보장할 수 없지만 갑판 위에서 우물쭈물하다가는 한 줌의 재가 될 거라는 건 분명하다. 


‘그래. 내 소명이 직장인일리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다로 몸을 던졌다. 


(출처. Unsplash)



'후......'


다행히 목숨은 붙어있다. ‘불길에서 탈출했다'는 안도감과 해방감이 느껴진다. 뜨거운 불길 속과 다르게 바다는 시원하고 고요하다. 하지만 나침반도 없이 맨몸으로 바다에 떨어졌다. 어느 방향으로 팔을 저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겠다. 


회사만 그만두면 바로 새로운 삶이 시작될 줄 알았다.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숨소리만 들어도 몸서리쳐지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 회사에서 쓰는 시간과 노력을 나의 삶에 쓰기만 하면, 나만의 빛나는 세상이 건설될 줄로만 알았다. 


회사를 나오는 동시에, 사회인으로서의 모든 기능을 상실했다. 29년 동안 부지런히 쌓아 올린 나의 성, 대기업 타이틀과 직함, 나의 자리, 나를 찾는 사람들, 모든 게 거품처럼 사라졌다. ‘나'라는 사람을 지탱해 주던 모든 걸 갑판 위에 두고 뛰어내렸고, 남김없이 불타버렸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그럼 이제 나는 누구지? 산다는 건 뭐지? 뭘 해야 하지? 누구를 만나야 하지? ’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 살아오다가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살았다. 한 번도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삶을 꾸려본 경험이 없었다. 앞을 보고 있지만 무엇을 봐야 할지 몰랐다. 오감이 살아있지만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몰랐다. 엄마 없이는 먹지도 눕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갓 태어난 생명처럼, 낯선 세상에 갓 태어난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갓난 생명'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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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 생존신고.



그로부터 8년,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삶의 첫 번째 혁명의 순간을 함께 했던 책을 다시 펼쳐본다. 불타는 갑판 위에서 뛰어내릴 용기를 주었던 문장과 오랜만에 마주하고 있다. 




타인의 삶으로부터 나는 뛰어내렸다. 
내가 되기 위해 나는 혁명이 필요했다.

_구본형

(출처. Unsplash)



퇴사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사람이 되리라는 포부를 품었다. 그가 말하는 ‘혁명'이 그저  ‘직업 세계관'의 혁명인 줄로만 알았다. 8년 동안 끊임없이 배우며 5개의 새로운 직업을 경험했다. 나의 소명을 찾는 일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유명 인플루언서나 사업가, 투자자로 성공한 삶을 이루지 못했다. 박사학위를 딴 것도 아니고 세계여행을 한 것도 아니다. 퇴사 후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어떠한 ‘성공적인’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 내 삶의 첫 번째 혁명은 실패인 걸까? 



그의 문장을 다시 읽어본다. 


"타인의 삶으로부터 나는 뛰어내렸다. 내가 되기 위해 나는 혁명이 필요했다."


지금에서야 문장이 제대로 보인다. 그의 말대로 나의 첫 번째 혁명은 ‘내가 되기 위한 혁명'이었다. 


숨 쉬는 것 말고는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사실은 제대로 숨 쉬는 방법조차 몰랐던 나를 온전한 존재로 키워내는 시간이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고 키워주었던 그때처럼 나를 재교육하는 여정이었다. 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살게 하는 것'이라 했다. 지난 8년은 망가진 몸과 마음을 살리는 시간이었고, 나의 영혼을 심폐소생 하는 시간이었다. 



이 글은 나의 첫 번째 혁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나를 살려낸 여정에 대한 기록이자, 온전한 나로 돌아오기 위해 애썼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물론 불구덩이를 피해 뛰어내린 바다에서 유유자적 수영을 즐기며 살아오진 못했다. 맨몸으로 망망대해에 떨어진 사람이 수영을 즐길 여유가 있을 리가. 서핑도 바다수영도 요트여행도 아니고 ‘생존'의 여정이었다. 날 것 그대로의 바다는 늘 잔잔하지만은 않았다. 파도가 치고 해일이 몰려오고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웠다. 짜디짠 바닷물을 먹으며 여린 콧속은 따끔거렸고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그동안 대체 뭘 한 거냐고 다그쳐도 나는 떳떳하다. 한 순간도 허투루 산 적이 없으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그것도 ‘잘'.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다. 바닷물에 몸도 마음도 정화되었다. 바다에 뛰어들어 나의 타고난 생명력을 되찾았다. 




사람은 자신의 가슴속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시야가 트이게 된다.
밖을 보면 꿈을 꾸게 되지만
안을 보면 깨어나게 되리라.

_칼 융


(출처. Unsplash)



오래된 거미줄처럼 켜켜이 얽혀있는 8년간의 과정을 글로 풀어낼 수 있을까, 심장이 저릿하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가 실마리가 될 수 있다면 해볼 만한 작업이다. 용기 내어 쓸 가치가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나를 찾는다고? 나는 이미 여기에 있는데?’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한편,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나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나를 잃어버린 채로 살고 있다. 더 정확히는 나에게 돌아올 이유와 여유를 갖지 못했다. 우리는 늘 바빴고 정해진 루트대로 성실히 살았다. 


우리는 ‘나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다. 어떻게 하면 나답게, 나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누가 그 답을 갖고 있을까? 눈을 부릅뜨고 찾아 헤맸지만, 넘어지고 깨어지며 몸으로 배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막막한 길 위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책뿐이었다. 책은 늘 아낌없이 주었다.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펼치기만 하면 책은 모든 걸 내어주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책 덕분이다. 책이 내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듯이, 내 이야기도 누군가의 방황의 길을 함께 해줄 등대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본다.



누군가의 지지고 볶는 인생경험 속에서 건져 올린 실낱같은 희망을 믿는 편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당신도 성공할 수 있다'라는 확신으로 다가오는 자기 계발서도 좋다. 하지만 ‘혹시나 나의 삶에서 당신이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기쁘겠다'라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에세이가 주는 잔잔하고 선명한 희망이 있다. 그렇기에 당당하게 나의 사사롭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 2016년 여름, 퇴사 순간부터 2024년 여름까지 - 구구절절 펼쳐내려 한다. 헨젤과 그레텔이 과자 조각을 하나하나 주워나가듯, 지난날을 차근차근 되짚어보며 나아가려고 한다. 


나에 대해 알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누구에게나 ‘나를 찾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글을 만난 지금이 당신의 시기일지도 모른다. 늦거나 빠른 건 없다. 모두에게 그 시기는 다르다. 단, 이 여정은 한 번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둘 수 없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좋다. 우리의 여정은 끝없이 이어질 테니. 


당신의 여정이 평안하기를, 자유롭기를,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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