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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보뽈로니오 Aug 17. 2017

흘러온 사람들

세번째 이야기. 살바도르(Salvador)

1. 

 식민지 브라질의 첫번째 수도였던 살바도르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이곳을 정복한 유럽인들,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흑인들의 문화가 뒤섞여 켜켜이 쌓여있는 도시다. 당시 이곳을 지배했던 유럽인들이 살바도르의 얼굴을 만들어 놓았다면, 흑인들은 이 땅에서 직접 살아가며 그들 삶의 조각들을 흩어놓았다. 그렇기에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이곳은 포장된 도로부터 오래된 가정집, 광장의 한구석까지 모든 것이 역사의 흔적이다. 이곳에서 문득 깔끔한 아파트 단지와 오피스의 마천루 사이에 8차선 도로가 가로 놓인 서울의 모습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혹은 자본에게) 편하게 구획되어 있는 서울에서 다만 50년 간이라도 그곳을 대표하고 있는 흔적이 몇가지나 있을지 생각해봤지만 손에 꼽기 어려웠다.

살바도르의 펠로리뉴 광장. 형형색색의 식민지 건축물이 도시의 중심을 장식한다.

 

 단선적으로 시작해본 싸구려 고찰은 꽤나 진지하고 느끼하게 이어졌다. 나는 나의 존재양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살바도르에서 무엇보다도 짙은 역사의 흔적은 이곳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 그 자체였다. 흑인이 전체 시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살바도르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은 피부가 들여온 검은 문화의 흔적들을 이어받았다. 모든 이가 이곳의 역사를 강렬하게 대표했고 그들 또한 이곳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으로 가득차보였다. 하지만 내가 대표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종류의 것들은 아니었다. 나는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큰 메트로 폴리스에서 온 배낭여행자였다. 한곳에 정착해 평생 그곳만을 묵묵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잠시나마 이리저리 부유하며 쏘다닐수 있다는 것은 특권일까 독선일까. 뭐가 더 좋고 나쁜지는 고르기 어렵지만 그들이 가진 자부심만큼은 부러웠다. 따뜻하게 우리를 품어주는 자연이 펼쳐져있던 휴양지에서 나와 역사의 흔적이 역력한 도시 한복판으로 떨어지니 이런 종류의 잡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2. 

  그렇게 세계 각지에서 부유하여 펠로리뉴 지구로 떠내려 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열올려가며 그렇게 살아가니까 누구 팔자가 더 좋다고 쉽게 말할순 없지만, 그중에서도 처지가 더 딱한 이들은 있었다. 

살바도르 시티 투어 중 Basílica do Senhor do Bonfim에 걸려있는 형형색색의 소원리본. 전세계에서 여행자들이 불치병에 걸린 가족의 기적을 빌며 묶는다.

 아나스타샤와는 살바도르에서의 두번째 날에 했던 시티투어 트래킹에서 만났다. 친러시아와 반러시아 진영이 내전 중이었던 우크라이나에서 아나스타샤는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우크라이나의 젊은이들은 불안한 정치적 상황과 높은 실업률로 인해 어떤식으로든 자국을 탈출하고 싶어했지만 불법체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주변국에서는 비자 발급을 꺼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마저도 최소한의 재산보유 상황을 입증해야 비자 발급 시도를 해볼 수 있었고 비자 발급 탈락 시에는 그 이유조차도 알려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우크라이나를 떠나고 싶었던 아나스타샤는 그나마 비자발급이 쉬운 남미를 택해 무작정 여행 중인 것이었다.

살바도르 시티 투어 트래킹 중 해인과 아나스타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해인을 통해 전해 들은 것이다. 나는 전날 밤 현지인들과 맨발로 길거리 축구를 하다가 양발에 심하게 물집이 잡혀 있는 상태였기에 자연스레 한발씩 뒤쳐져서 걸으며 해인이가 다른 이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해인은 한나절 동안의 트래킹 내내 아나스타샤와 나란히 걸으며 어느새 그녀의 둘도 없는 여행친구가 되어주었다. 상대가 아프게 느낄만한 속사정을 직접 찌르지 않고 스스로 편하게 털어 놓을 수 있게 하는 묘한능력을 해인이는 가지고 있었다. 이런 능력은 절대 사려깊고 철저하게 계산된 종류의 배려는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웃으며 이야기 하다가도 슬픈 노래에 갑작스레 눈물을 흘릴 줄 알고, 타인의 깊은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 할 줄 알았다. 살바도르의 도심을 걸으며 해인의 풍부한 감정은 아나스타샤가 짊어진 인생의 무게에 빠르게 젖어들었고 진심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그녀에게 아나스타샤는 모든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아나스타샤는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해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터놓으며 내심 위로를 받고 있었다. 만약 내가 홀로 여행중에 아나스타샤와 만나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를 배려한답시고 아픈 질문은 피해 다니며 가당치도 않은 공감대를 찾으려고만 했을 것 같다. 하지만 한걸음 더 솔직하게 들어가보면 이것은 배려를 가장한 이기심이다. 여행 중에 스치며 만난 나에게 어차피 상대는 자신의 짐을 같이 지어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의 입장에서 진심을 다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해인을 통해 배운다.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나에게 그저 눈을 마주하고 함께 하면 된다며 나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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