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밥벌이는 거룩하다. 하지만 동시에 고되기도 하다. 출근이 하기 싫거나 몸이 힘든 날에 나는 어느 원시 시대를 떠올린다. 여러 사람들과 모여서 채집 생활을 하고, 사냥을 하며 지냈을 내 모습을 상상한다. 그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세상만사가 형통했을 그 시절, 사람들은 그 얼마나 단순한 삶을 살았을까? 기술의 발달이 우리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해 주었다는 말은 얼마간은 진실이고, 얼마간은 거짓이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다 보면 그저 원시인처럼 나와 가족들의 '안위'만 생각하며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원시인을 부러워하다가도나의 상상은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커다란 짐승에 쫓기거나, 혹은 대처하기 어려운 부상 혹은 질병 등으로 시름시름 앓는 것으로 난데없이 끝이 난다. 그러면 나는 비극적인 결말에 슬퍼하며 공상을 멈추고 어쩔 수 없이 현실로 출근을 하는 것이다.
교사 생활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이 직업만의 애환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세상 어떤 직업이 그저 좋기만 할까? 교사의 힘든 점, 어려운 점에 대해 말하자면 끝도 없고 슬프기만 할 뿐. 나아가 '자기 연민'이란 지독한 늪에 빠질 수도 있으니 그럼에도 좋은 점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운 점 한 가지. 이 바닥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기란 참 쉽지 않다는 것. '가르치는 일' 자체의 특수성_다시 말해 가르침의 결과를 즉각적, 정량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을 테고, '교육'의 광범위성_교사만이 교육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오는 문제도 있을 것이다.
교사의 전문성이란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나만의 문장을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전문성을 갖춘 교사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리하여 찾은, 전문성을 갖춰가기 위해 기억해야 할 나만의 명제 한 가지가 있으니 그건 바로 '돈 받으니까 프로다.' 되시겠다. 어쨌건 가르치는 일을 하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돈을 받으니, 이 명제에 따르면 나는 프로가 맞다. 내가 찾았지만(?) 이 명제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어서 나는 같은 길을 걷는 동료들, 혹은 후배 교사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밥을 먹을 때, 술을 마실 때 이 말을 종종 써먹곤 한다.
교직관을 통해 살펴보는 내 일의 정체성
이혁규 교수의 책 「한국의 교육 생태계」에서도 일부 언급된 바 있는 '교직관_교직의 본질을 보는 관점'을 떠올려 본다. 전통적인 교직관은 '성직자관'이다. 교사보단 '선생님' 혹은 '스승'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했던 시절을 대변하는 관점이다. 교사도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인식하는 '노동직관'과, 전문성을 갖추고 교육을 행하는 전문가라고 인식하는 '전문직관'도 있다. 2024년 현재, 학교 현장의 수많은 교사 중 한 명인 나를 멀리 떨어져서 바라본다. 이 시대는 나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나?
늘 따뜻한 말과 응원으로 내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지원하는 학부모나, 연세 지긋하신 어른들 앞에서 나는 성직자와 다름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올 해도 그랬다. 학부모 상담 주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교실에 들어와 '올해 우리 누구를 가르쳐주실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하셨던 학부모님이 있다. 상담이 아니라 정말 인사가 목적인 방문이었기에, 나는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뿐일까. 애들 가르친다고 욕본다며 나의 직업만으로 나를 안쓰러이 여기고 격려해 주시는 어르신들 앞에 설 때도 역시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대단하게 여기시나, 그저 죄송하다가 그러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도 된다.
무리한 요구를 서슴지 않거나, 학교에서 모든 것을 해주기만을 기대하는 학부모 혹은 교사를 폄하하거나 혐오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대체 가능한 노동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교사를 노동자로 대하는 사람들이 대개 교사에게 성직자급의 직업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겪은 바 없지만 동료들이 경험한 터무니없는 사례들을 듣다 보면 가끔은, 교사가 성직자가 아니라 신이길 바라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물론 전문가가 되는 보람찬 순간도 있다. 지도하기 어려웠지만 나름대로 성장한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내가 전문가에 한 걸음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어느 학년의 교육과정을 다 꿰게 되어 짜임새 있는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실제로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 혹은 아이들이 내가 가르친 내용을 내면화하여 저들끼리 학습 대화를 할 때도 그렇다. 아이들에게서 받았던 수많은 편지 속 내용 중, 가장 기뻤던 칭찬은 '선생님이 가르쳐 주실 때는 뭐든지 다 재미가 있고 이해가 쏙쏙 잘 돼요.'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찰나 같은 순간들을 소중히 모아 내 일을 지속할 원동력을 얻는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교사는 학교 밖에서 직업을 밝히길 꺼린다. 나의 별 것 아닌 행동이나 말 한마디가 혹여나 '교사'라는 직업 전체에 대한 어떤 편견이나 오해를 만들까 우려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 교사라면서?' 혹은 '그러고도 교사야?'라는 말을 들을까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사회에서 '교사'라는 직업을 보는 관점이 여전히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저 교사예요.'라고 했을 때, 상대방이 내 말에 어떤 대꾸를 할지 모른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의도치 않게 성직자이며, 노동자였다가, 전문가이길 희망하는 '교사'이다.
내가 바라는 교직관은 '노동자'와 '전문가' 사이 그 어딘가에 있다. 교사 역시 '노동자'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엄연한 '노동'이다. 몸을 쓰는 것만이 노동이 아님을, 하지만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때 몸을 써야 하는 순간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교사도 노동자가 맞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자신만의 이상과 소명 의식을 갖고 아이들을 마주하는 우리의 일을 떠올려 보면, 이는 역시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다.
참교사 말고 그냥 교사하면 안 될까요?
'참교사'란 말은 교사들에게만 익숙한 말일까? 이미 교사인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참교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띄어쓰기로는 '참 교사'가 맞지만, 교직 사회에서는 이미 하나의 명사와도 같은 말이기에 '참교사'로 표기하겠다.) 내가 교대에 다닐 때만 해도, '참교사'라는 말이 갖는 온도가 지금과는 달랐다. 교대는 그 특성상 교과 수업을 듣고 수업을 설계한 후 동기들을 학생으로 가정하여 실연을 하는 형식의 수업이 많은데, 우리는 수업을 잘 설계했거나 잘 한 친구들을 칭찬할 때 "와~ 참교사다."라고 했다. 실습에서 만난 아이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이어나가는 친구들을 볼 때 '진짜 참교사네.' 했다. 부끄럽게는 여겼을지언정 누구도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참교사'라는 말은 비꼼과 칭찬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낱말이 되어 버렸다. 우리끼리도 서로 '참교사'가 되지 말자고 다소 자조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심지어 어느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아, 예. 참교사이시네요.'라고 말하면, 그건 '비꼬는 것'이다. 말의 의미만 두고 생각해 보면 '참교사'라는 말은 아무래도 교사를 '성직자'로 대했던 시절에 어울리는 말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점. 시대가 변해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참교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사상'을 아직도 찾지 못했을 뿐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인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 열심히 하는 사람이 핍박받는 조직은 성장할 수 없다. '참교사'란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퇴색할 동안, 교직 사회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 전통적 의미의 '참교사'가 되고 싶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내겐 성직자처럼 스스로를 단련하고, 늘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하는 그런 교사가 될 자질도, 자신도 없다. 나는 그냥 아이들과 즐겁고,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 나가는 교사이고 싶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직업인 중 하나이고 싶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전문성 있는 교사'가 되고 싶지만, 그래도 '참교사'란 말이 어서 본래의 온도를 회복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자신을 성직자로 대해주길 바라는 교사는 없을 것이다. 많은 기대를 받는다는 것은 동시에 엄격한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르치는 일이 전문가의 영역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지만, 교직이 전문직이 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사실도 안다. 사실 나 역시도 나의 일이, 이 직업의 정체성이 가끔은 헷갈리는데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누군가 내게 '그래서 어떡하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서로 힘들고 만만찮은 세상살이, 그래도 열심히 살겠다고 노력하는 현대인 중 하나로 담백하게 바라봐주면 좋겠다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서로 가벼운 연민을 갖고 조금은 따뜻하게 대하면 좋겠다고.각자의 분야에서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해나가는 서로가 있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안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