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응급실, 첫 직장, 첫 회식
응급실에는 그곳만의 공기가 있다. 마치 그곳에서는 바깥 세상과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이곳저곳에서 발산적으로 쉬익쉬익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무채색의 표정을 하고 누워 있는 나.
내가 처음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그날도 그랬다. 나는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어리둥절한 채로 팔에 바늘을 꼽고 또옥또옥 떨어지는 수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한거지?
곧 머리를 부숴버릴 것 같은 두통이 느껴졌다. 마치 심장이 머리에 달려있는 것 같이 머리에서 쿵쿵 박자가 느껴졌다. 나중에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야 알았다. 한 번 경기를 하고나면 이렇게 깨질듯한 두통이 따른다는 것을.
그 뒤로 며칠에 걸쳐 나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MRI, CT, 혈액, 뇌파 검사들을 진행했다. 처음 해보는 검사들은 결코 즐겁지 않았다. 그 때까지도 여전히 이 검사실에서 저 검사실로 이동하며 다니는 내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 링거줄이 엉키지 않도록 옆에서 잡고 있는 엄마와 가끔 눈을 마주칠 때면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순간적으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몸의 신경반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듣는 날, 놀랍게도 나는 모두 정상이었다. 담당 의사는 원래 중증이 아니면 검사를 해도 원인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증상이 나타나는 그 당시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의 말은 내게 반쪽짜리 위안을 주었다. 일단 검사에 나오지 않았으니 내가 괜찮을 수도 있지만, 괜찮지 않아도 검사에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도 ‘그래 컵에 물이 이미 반이나 차 있네,’와 같은 희미하고 연약한 희망을 가지고 약을 먹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약을 먹는다는 것은 내가 그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환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나는 한 번의 발작을 경험했다고 내게 뇌전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잘 알고 싶지도 않은 그 병은 내게 너무나도 두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뒤로도 나는 몇 개월에 한 번씩 크고 작은 발작을 경험했다. 언니가 나의 발작을 보고 까무라친 적도 있고, 혼자 조용히 자다가 발작을 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내가 뇌전증 환자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건 내게 너무나도 큰 용기를 요구했다.
약을 먹기 시작하게 된 건 인생 첫 직장에서 일을 시작한지 첫 주만에 또 한 번의 쓰러짐을 경험하고 나서였다. 첫 점심 회식 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쓰러졌다.
하필이면 회식을 하던 식당이 긴 직사각형 테이블에 모두가 일렬로 나란히 마주보며 앉는 구조였다. 그래서 나는 뒤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슬로우모션으로 내 앞에 앉아있던 모든 이들과 차례로 눈을 마주치는 듯 느꼈다.
곧바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갔다. 처음보다는 덜 무섭고 어색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는 듯 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약을 처방받아 먹기 시작한건.
물론 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내가 나의 병을 완전히 받아들인건 아니었다. 그건 두려움 반, 체념 반에서 나온 자기보호의 제스처였다. 나를 보호해야만 했다. 약을 먹지 않으니 계속 쓰러졌다. 쓰러질 때마다 뒤통수에 혹, 눈에 멍, 뺨에 상처 등이 생겼다. 한 번은 의식을 잃으면서 얼굴을 땅에 그대로 부딪혀 앞니가 뒤로 쑥 밀린 적도 있었다. 치과의사의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냥 넘어졌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마음의 상처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마치 이글거리는 불주먹 하나가 가슴 한 가운데를 쑥 관통하고 지나가 커다란 구멍 하나를 남기는 것 같았다. 남은 건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 작은 불씨들과 검은 재뿐. 도저히 메꿔지지 않을 것 같은 홀(hole)이었다.
처음 약은 보라매 병원에서 처방받았다. 그리고 그 약은 내게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다주었다. 다시는 보라매 근처도 내가 얼씬거리지 않을 정도로.
뇌전증에 관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QnA #1
Q: 뇌전증은 유전인가요?
A: 아닙니다. 뇌전증은 후천적 요인 (뇌 손상 후유증, 후천적 감염, 사고, 그 외 알 수 없는 요인) 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으며, 유전적 요인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출처: 서울아산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