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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꽃을 달였습니다

뜨겁고 무겁던 그 보온병엔

내가 약을 먹기 시작한 뒤부터 엄마는 백방으로 뇌전증에 좋다는 민간요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강의 일을 한 덕분에 컴퓨터를 다룰 줄 알았던 엄마는 구글 검색창에 ‘뇌전증에 좋은 음식’을 검색해 봤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나온 음식들 중에 본인이 생각하기에 효과가 좋을 것 같은 것들로 식탁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는 한 블로그 포스팅을 보았다. 뇌전증이 있는 아들을 둔 한 엄마가 쓴 글이었다. 그 엄마는 아들이 무궁화꽃 뿌리를 달인 물, 다시 말해 무궁화뿌리차를 일 년간 꾸준히 마시고 증세가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전에는 한 달에 두세 번 하던 경기를 이제는 두세 달에 한 번 한다고 했다.


엄마는 그 길로 전국에 무궁화꽃을 다량으로 파는 꽃집을 수소문했다. 그런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무궁화꽃만 전문으로 다루는 곳은 많이 없었을뿐더러 뿌리만 팔겠다고 하는 곳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다 어느 날 지인의 지인의 사촌형이 진주에 무궁화밭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파는 용도가 아니라고 했다. 엄마는 그 사촌형의 연락처를 얻었다. 그리고 그와 긴 통화를 마친 끝에 진주로 향했다.


그날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온통 흙투성이었다. 머리는 오는 길에 대충 정돈한 듯했지만 평소 스프레이로 단정하게 하고 다니는 스타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헝클어져 있었다. 집 앞 산책용으로 입는 옷에는 흙자국이 여기저기 보였다. 엄마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눈에는 감출 수 없는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엄마는 자신이 직접 밭에서 뿌리를 캤다고 했다. 신발장에 놓인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지 두 개에는 두꺼운 나뭇가지로 보이는 것들이 삐죽빼죽 담겨 있었다. 엄마는 에고고 신음 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내는 소리인 것 같았다.


다음날 엄마는 무궁화꽃 뿌리를 하나하나 씻고, 자르고, 말리는 과정을 시작했다. 그 과정은 며칠이 걸렸다. 뿌리를 달이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달이는 데에 정확한 시간 엄수가 중요했기 때문에 알람을 맞춰 자다가 새벽에 달임 기계를 끄는 건 일상이었다. 그 과정이 끝나자 엄마는 매일 내가 출근하기 전 차를 따뜻하게 데워서 보온병에 챙겨주었다. 내가 보온병을 가지고 갈 수 없을 때에는 새로 장만한 진공포장기계에 하나씩 진공포장을 해서 챙겨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엄마는 알람 소리가 울리기 전에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새벽, 눈을 반만 힘겹게 뜬 채 다리를 휘청거리며 달임기가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엄마는 버릇처럼 말했다. 꾸준히 마시면 그 블로그에 나온 아들처럼 차도가 있을 거라고. '꾸준히'가 중요하다고. 




그런 엄마의 노고가 담긴 무궁화뿌리차를 그저 감사히 먹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매일 아침 엄마가 건네주는 그 뜨거운 보온병이 싫었다. 내게 그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그 안엔 무궁화뿌리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생긴 엄마의 노고, 그런 엄마에 대한 미안함, 그 차를 마시고 어떻게든 나아져야 할 것 같은 압박감도 함께 담긴 듯했다. 그래서 엄마가 내게 그 차를 건넬 때마다 나는 퉁명스럽게 낚아채곤 했다. 무겁게 왜 이런 걸 주냐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그 차가 담긴 보온병을 가방에 넣고 출근하자면 어깨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하루는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엄마는 그날도 어김없이 뜨겁게 덥힌 무궁화뿌리차가 담긴 보온병을 내게 건넸다. 그런데 그건 처음 보는 보온병이었다. 엄마는 세일하길래 마트에서 새로 사 왔다고 했다. 나는 오랜만의 저녁 약속에 들떠 평소 매고 다니는 백팩 대신 숄더백을 매고 블라우스에 스커트를 입은 채 집을 나섰다.


출근길 버스가 회사에 거의 다 도착해서였다. 가방을 무릎 위에 놓고 앉아가고 있는데 무릎에서 뭔가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가방을 들어 밑면을 보니 무언가 샌 자국이 그림자처럼 져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가방을 열어보자 무궁화뿌리차가 보온병에서 새어 나와 가방 안 물품을 온통 적셔 놓았다. 핸드폰이며 지갑이며 할 것 없이 모든 게 축축했다. 재빨리 보온병을 꺼내보자 뚜껑이 제대로 닫혀 있지 않았다. 보온병 안에 내용물은 거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멍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곧 엄청난 분노가 휘몰아쳤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가방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옆의 버스 창문을 주먹으로 깨부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속에선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왜 하필이면 내게!” 하는 절규가 울려 퍼졌다. 무궁화뿌리차가 보온병에서 샌 일은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내게 뇌전증이 없었다면 우리 엄마는 그 고생을 하면서 차를 달일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럼 나는 그걸 보온병에 담아서 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럼 그걸 가방 안에 쏟을 일도 없었을 텐데.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모든 건 다 내가 아파서, 였다.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더 이상 할 말이, 정확하게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버스가 사무실 앞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조용히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걸어갔다. 내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 안 소지품을 하나씩 꺼냈다. 그저 물기를 닦고 그날을 살아가는 것 외에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 일을 해내야만 했다. 그런 하루도 살아가야만 했다. 




뇌전증에 관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QnA #4

Q: 발작 후 증상은 어떤가요? 
A: 환자마다 차이는 있지만 두통, 기억 상실, 말하고 쓰기의 어려움, 어지러움, 구토 증상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출처: 서울아산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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