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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Oct 02. 2024

사랑꾼이 말하는 사랑의 민낯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웃음이 많고 또 그만큼 눈물도 많다. 자랑은 아니지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타인의 인정을 통해 얻는 편이라 여기저기 조언을 구하고 확인을 받은 뒤에라야 내 결정에 안심을 하곤한다. 그런 조심스러운 점 때문에 신중할 때가 많고, 추진력이 강한 사람들과 궁합이 잘 맞는다. 이런 성향의 집합체가 나를 이룬다. 눈물없이 웃음만 많은 나, 라거나 신중하면서 추진력이 강한 나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착한 사람이 동시에 나쁜 사람일 수 없고, 여린 사람이 동시에 강인한 사람일 수 없듯.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문제해결이나 감정표현의 방식이 있다 이건 마치 DNA나 지문과도 같아서 그 사람의 고유한 특징이고 뇌회로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관계지향형인 리더가 팀웍과 집단지성을 통해 합의점을 끌어내거나, 목표지향형인 리더가 해결책을 제시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어떤 것이 옳거나 우월한가를 가리는 건 무의미하다. 다만, 관계지향형인 사람이 독단적일 수 없고, 목표지향형인 사람이 우유부단하지 않듯, 서로 배타적인 감정을 동시에 지니지는 않는다.


나는 그래서 부부관찰 예능은 안보는 편이다. 바람직한 부부의 모습이나 이상적인 배우자를 지나치게 틀 속에 가두기도 하고, ‘완벽한 인간형’ 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들어서이다. 물론 거기에 나오는 남편들은 대부분 사랑꾼이지만 생활지능은 0에 수렴하는 어리숙하고 순진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건 완벽이 아닐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완벽이란, 서로 배타적인 감정을 한 몸에 끌어안은 완벽을 말한다. 사랑표현에는 지고지순하고 순수한 아이같지만, 누구보다 아내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어른스럽다. 과묵하고 진중하지만, 아내에게 꽃을 사다 바치고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그런 남편의 허술한 일상생활이 얼마나 귀여운가, 남편의 사랑이 얼마나 순수한가 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살아보면 다 거기서 거기고 그인간이 그인간이라는 숱한 어르신들의 이야기와 나의 경험에 의문을 품게 된다.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인가. 나의 결혼생활만 불행한가. 진짜 저렇게 행복한 것이 결혼인가.


분명한건, 그저 ‘사랑꾼’ 이기만 한 사람 이란 현실에는 없다는 것이다. TV는 그걸 왜곡해서 묘사하고 있다. 사랑꾼이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수만가지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라서 사랑에도 솔직한 사람이다. 사랑꾼을 바라볼 때 우리의 초점은 ‘사랑’ 이 아니라 ‘꾼’ 이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점을 간과한다. 나 역시 그 점을 간과했었고, 한때 사랑꾼에 대한 판타지를 갖기도 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연애의 이유와 목적이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사랑의 순수함 그 자체인데 그걸 지적하면 사랑을 부정하는 게 될까봐 그저 사랑에 속은 건 아닐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사랑 표현에는 끝간 데 없이 솔직하면서, 미움에는 과묵하고 진득하니 조용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누리는 기쁨과 행복에 순진하고 무구한 이가 슬픔과 절망에는 어른스럽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게 가능할 것인가. 그런건 사랑봇, AI에게나 가능하다. 기계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랑에 진심인 사람은 미움에도 진심이다. 표현에 익숙한 사람은 사랑만이 아니라 증오도, 분노도, 슬픔도, 즐거움도 모두 잘 표현한다. 그들은 이미 감정표현에 능숙한 ‘꾼’ 들이다.  짜증꾼, 슬픔꾼, 미움꾼 이라는 이름으로도 충분히 불리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연애를 할 때는 좋은 면만 보여주고 싶고, 좋은 점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부각된 것일 뿐 언제나 감정을 드러내 표현하는 것으로 다스리고 해결해온 이들은 표현을 덜 하거나, 덤덤해 보이는 이들은 감정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무관심하다고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 역시 사랑의 기쁨과 행복에도 본인과 비슷한 속도와 강도로 달아오르기를, 이별의 슬픔과 불행에 자신의 텐션과 비슷한 감정곡선을 그리기를 바란다. 그런 감정의 롤러코스터때문에 상대방은 지쳐가는데도 본인과 상대방의 텐션이 비슷할 것이라 넘겨짚기때문에 상대방이 표현을 하지 않으면 상대의 감정을 의외로 잘 읽어내지 못한다. 본인의 감정에 빠져있고 그걸 지나치게 느끼고 표현하는 사람이 상대의 감정은 읽지 못하는 아이러니다. 지나고나서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라면서 그 때의 상황을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험, 많이들 해봤을 것인데 보통 상대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는 이들이 하는 대사다. 본인처럼 표현해야만 드러냈다고 생각하는 1차원적인 생각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실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위하는 사랑이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내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에 가깝다. 사랑에 빠진 자신에게 빠지는 것이다. 이들이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은 도취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랑도 그렇지만 슬픔, 비탄, 절망도 상대방이 함께 깊이 느껴주고 공감해주길 바란다. 그럴 때, 사랑뿐 아니라 우울도 전염된다. 우울이 사랑보다 전염의 속도가 훨씬 빠르다. 원래 나쁜 감정이 더 빠르게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잠식하는 법이다.


가스라이팅도 비슷한 층위에 있다. 사랑꾼들이 말하는 사랑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고, 늘 그 텐션을 유지해야만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  ”왜 나만 항상 너를 사랑하느냐“ , ”너는 왜 아무말도 안하느냐“ , “그렇게 나오는 걸 보니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라고 상대방의 감정을 멋대로 해석해서 이름붙이고, 강요하고, 정의내린다. 내 기분과 감정, 사랑의 주인은 나인데 사랑꾼에게 좌지우지되고 종속되는 것이다. 범죄라도 저질러야 가스라이팅이 아니다. 내 기분과 감정이 연인에 의해 달라지는 것, 그러다가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게 된다면, 그것도 가스라이팅의 일종이다.


사랑꾼이란 어쩌면, 감정을 어른스럽게 다스리고 처리하는 데 미숙해서 사랑도 날 것 그대로 유아기적 모습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연애를 할 때는 그런 표현과 사랑의 방식이 나를 더 깊이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상대방을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으로 작용할 지 모른다. 결혼을 하고 일상이 된다는 얘기는 달라진다. 상대방의 감정과, 지나친 감정표현으로 나의 하루가 영향을 받고, 내 감정이 널을 뛰게 된다면 그 사랑타령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순간이 분명히 온다. 사랑표현에 솔직한 사람은 또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이 식었다면 그것 역시 가난이나 재채기처럼 숨기지 못하고 바로 들통이 난다. 지금 내가 결혼하고자 하는 사람, 사랑에 빠진 사람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자. ‘사랑꾼이라서’ 가 이유의 전부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눈물없이 웃음만 많은 나라거나, 신중하면서 추진력강한 나, 관계지향적이면서 독선적인 리더, 목표지향적이면서 우유부단한 사람이란 없다. 그건 모순이다. 사랑꾼이라는 말을 믿는다면, 사랑표현에만 진심이고 미움에는 무딜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사랑에 진심인만큼, 미움에도 진심이며, 감정표현에 능숙한 꾼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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