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볕뉘에 대해 알게되고 느끼고 음미했던 최초의 순간들은 아마도,
남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던 대학교의 방학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오후의 우리집,
커튼을 쳐 어두운 방,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면
커튼 틈 사이로 햇빛은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내가 조금이라도 뒤척일때마다 빛 사이로
먼지들은 유영하듯 부유했다. 오래도록 누워 그걸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러고 있자면 내일이 온다는 사실,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는 사실, 곧 엄마가 돌아온다는 사실은 쉬이 잊혀졌고
나와 멈춘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고요와 적막만이 있었다.
멈춘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아 해는 빠르게 저물었고, 볕뉘도 불타듯 붉은색으로 내방에 더 머물다가 이내 사라졌고 곧, 엄마가 돌아오곤 했다.
그게 바로 ‘편안’ 과 편안에서 오는 ‘행복’ 이었다는 건,
이제 돌아오는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하는, 내 삶을 내가 책임지는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볕뉘가 있다.
언제고 곱씹으며 꺼내보는 시간.
위로가 되는 아련한 시간 말이다.
그게 나에게는 볕뉘인 것 같다.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
이렇게 아름다운 말이 있다니.
뜻은 모르지만 의미를 알고 있는, 그런말들이 있다.
의미는 발화를 통해야 생명을 얻는다는데,
볕뉘,
볕뉘,,
볕뉘가 지나가던 그 시절 내 방과 내 시간.
이제 생명을 얻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