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序詩에 담긴 마음 읽기(2-2)

도석적 해석에 의한 시 분석의 실험

by 푸른킴

이제 앞서 다룬, 도석의 결과를 토대로「서시」의 시구를 다시 되새겨보려 한다.


「서시」로 알려진 이 시는 윤동주가 국내에서 남긴 가장 제목 없는 마지막 작품이다. 이 시를 제목 없이 첫 시집의 서문에 실으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이어지는 시들을 압축하는 개인의 농축된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즉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는 시적 감성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시인 윤동주의 마음에 일어난 그의 인간적 실존, 윤리적 자아상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1. 「서시」 첫째 문장 감상

이제 시의 각 구문을 살펴보자. 시는 모두 세 문장이다. 여덟 행까지가 두 문장이고 독립된 마지막 행이 한 문장이다. 따라서 모두 세 문장으로 이뤄진 시이다. 나는 이제 각 문장을 암송하면서 다시 읽은 본문과 원문을 대조하며 그 의미를 분석해보려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시에서 나는 두 가지를 주목했다. 하나는 원문에서 하나로 이어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를 행갈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두 번째 행(없기를,) 끝에 있는 ‘쉼표’다. 이런 변화는 공통으로 시인의 다부진 결단을 직접 체감하게 해 준다. 특히 시인이 직접 찍어 둔 쉼표는 이 시를 이해하는데 읽어서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열린 관점을 다양하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길을 걸으며, 이 쉼표에서 항상, 반드시 멈추려 한다. 그것을 통해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떠올릴 수 있었다.

(1) 과거 회상: 이 쉼표는 문장을 전반절과 후반절로 나눌 수 있다. 이 경우, 쉼표 앞 문장은 상상하는 문장이 된다. 즉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은 자기 마음속 말이다. 간직하고 살아왔던 고백이다. 시간(죽는 날)과 공간(하늘 향해), 다짐(부끄러움 없기를) 등이다. 이 사색적 고백이 쉼표 뒤 문장으로 바로 이어진다.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것은 자기 회한과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실존이다. 자기가 살아오는 시공간 내내 그는 ‘부끄럼이 없기를’ 희구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늘 괴로움만 남았다. 심지어 그는 ‘잎새에 이른 바람에도’ 삶이 긁혔다. 따라서 이 경우 쉼표는 시인이 괴로움에 직면한 이유가 자신의 과거 다짐에 있었다는 것을 일러준다. 이 쉼표는 과거 회고문장을 부각한다.

(2) 현재 성찰: 다른 한편, 나는 이 쉼표를 중심으로 앞뒤 문장이 도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어 ‘나는’과 서술어 ‘괴로워했다’ 사이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를 넣어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잎새에 이른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라는 문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에게 ‘하늘을 우르러...’는 괴로움의 대상이다. 시인은 하늘을 향해 괴로워한다.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가 아니라 ‘하늘’이다. 하늘을 보면서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면 살지만, 결국에는 그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쉼표는 시인의 고백을 현재로 이끌어준다.

요컨대, 문장의 분절과 쉼표의 부각은 시인의 마음이 괴로워하는 대상을 강화해 준다. 시인은 하늘을 향해 괴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를 토대로 서시의 첫 문장을 해석해 보자.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을 느끼자, 자기 삶을 성찰한다. 이 구절에서 잎새와 바람은 마치 계절어 같다. ‘잎새’라는 말속에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 생동하는 느낌이 강하다. 바람은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불지만 이내 어린잎이 살랑살랑 대는 모습에서 바람의 존재가 선명해진다. 시인은 미세한 감촉을 발휘해서 이 흔들림을 관찰한다. 그것이 곧 시인이 ‘괴로워’하는 모습이 투영된 흔적이다.


이제 그는 이 흔들림을 따라 괴로워한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괴로워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로워하는 대상을 명시한다. 만약 앞서 본 대로, 현재를 성찰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는 지금 자신이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러움을 갖고 있다’라고 인정한다. 하늘 앞에서 자기 현재가 괴롭다는 말이다. 만약, 과거를 회고한다는 것을 반영한다면, 그는 아직도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 위해 분투한다. 그는 여전히 잎새에 이른 바람으로 자기 ‘괴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초하면서까지 자기 삶을 자기 고백에 부합하도록 견인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둔감해도 좋을 바람이다. 하지만, 그는 그 앞에 서서 자기 의지가 여전히 유효한지 확인한다. 하지만, 여전히 괴롭다. 시인은 언제나 하늘을 향한 자기 시선을 간직한다. 그러다 미세한 바람에 살랑이는 잎새에서 다시 자신을 직시한다. 관조한다.


이런 시선의 이동은 시인이 자기가 살아온 삶, 앞으로 살아갈 삶을 하늘에 비춰 초점화한다. 이런 시선은 곧 잎새를 거쳐 자기 안으로 향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행 분절과 쉼표의 기능은 시인을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주고 나아가 그가 아주 작은 바람에도 하늘 앞에서 괴로워하는 실존을 지켜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2. 둘째 문장 감상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 가야겠다.


이 시구에서 가장 주목할 특징은 전체가 한 문장이라는 점이다. 언뜻 읽으면, 두 문장처럼 보인다. 두 번째 행 ‘사랑해야지’ 다음에 문장기호 없이 어색하게 접속사 ‘그리고’를 굳이 사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장 연결기호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그리고’를 중심으로 앞뒤 구문이 서로 병렬 형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이해하듯, ‘A 그리고 B다’ 하지만, ‘A 그리고 A′다’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두 개는 같은 내용에 대한 나열일 수도 있고, 하나의 행동이 더욱 점층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나는 길을 걸으며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한 문장으로 이어 읽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고’를 중심으로 A에서 A′로 사고가 발전한다는 점이다.

A.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A′.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실제로 읽어보면, 이 두 문장은 같은 내용을 병렬한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연속적인 내용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A 그리고 B’로 읽으면 이는 시간의 연속, 이어짐 일 수 있다. A가 먼저 일어난 일이고 B가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A가 실현되지 않으면 B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고를 병렬로 읽는다면 ‘A여야 B이다.’라는 도식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구문은 오히려 A에서 A′라는 점에서 시인이 ‘그리고’를 쓴 이유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시간으로, 사건으로 병렬되는 표현을 원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를 자세히 되새겨 읊조리면 서로 다른 두 내용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발전적으로 이어 쓴 것에 더 가깝다. 이를 정리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두 구문을 하나로 읽는 것에 대하여: 이 구문은 한 호흡으로 읽을 때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리하여 시인이 강조한 방점이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 찍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별, 노래, 마음’은 ‘사랑’으로 가기 위한 교두보라는 것이다. 또한, 시인이 말한 ‘모든 죽어가는 것’은 일반적인 사물이나 피조물로 보기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것이 ‘시인 자신의 삶’으로 읽힌다. 결국, 이렇게 한 문장으로 이어 읽으니 이 구문은 시인 자신의 다짐과 이어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을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구문을 하나로 이어 붙인 A 문장부터 읽어보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일단, 너무 서정적이어서 손대기가 머뭇머뭇해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한숨에 내달리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일단 ‘마음으로’부터 보자. 이 표현은 훑어 읽기에서도 어떤 방법이며, 수단을 암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는 도대체 어떤 방법인가? 시인은 어떤 마음을 상상했을까? 혹시 시인이 유학을 떠나기 전, 용정 밤하늘에 펼쳐졌던 그 별들을 보며 괜한 감정이 솟아올랐던 것일까? 그런 추억이라면 ‘별을 노래한다’라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일까? 정확히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별을 보며 노래를 한다는 것인지, 별 자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은유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아주 쉽게 ‘별’을 이상화된 세계로 접목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다. 시인에게 ‘별’이 이상화된 대상이라면 이어지는 다른 모든 것도 다 비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해는 이 시 첫 문장에서 보여준 지극한 현실 대면과 어색한 흐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길 위에서 이 대목을 생각할 때, 어느 밤길을 떠올려보았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곧 ‘하늘을 우러러’라는 행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늘 경외하는 대상인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가 빛이 가득한 낮을 연상하게 한다면, 별을 노래하는’이라는 표현에는 깊은 밤이 어울린다. 그렇다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추앙이 아니라 경외다. 자신을 성찰하는 거대한 초월의 대상인 셈이다.

그래서 이 시를 되새기다 보면, 시의 리듬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시인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는 정말 수단일까? 아니면 어떤 상태, 자기 안에 일어나는 경외의 감정일까? 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연상하는 것이 ‘별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별을 보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은 ‘별을 노래하는’을 빨리 붙여 ‘마음’을 드러내는 리듬으로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랬을 경우,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곧 ‘하늘을 우러러’는 자신과 동일시하려 했다는 시인의 태도를 조금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역시 ‘사랑해야지’에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결국, 시인은 하늘을 보며 괴로웠던 것처럼 별을 보며 사랑하지 못한 자아를 성찰한다. 그 구체적인 대상은 놀랍게도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한 채 살아온 나날들이 그를 괴롭힌 것이다. 하늘과 별 앞에서 말이다. 이렇게 시인은 낮과 밤 어느 시공간이든지 자기 삶을 관조하는 영역을 스스로 만들어 두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괴로워했’던 것도 새롭게 변주된다. 바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라는 것과 이어진다. 생각해 보면 ‘잎새’가 살아나는 묘사라면, ‘죽어가는 것’은 그 반대편에 있다. 따라서 ‘잎새’와 ‘죽어가는 것’은 삶의 시작임과 동시에 삶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것이다. 이 둘은 모두 시인 자신을 환유한다. 어리고 죽어가는 자기 실존, 그 안에서 불안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좀 더 주목해 보자. 오늘 내가 이 서시를 생각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것을’과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시인이 ‘모든 죽어가는 것을’이라고 쓴 것을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이라고 필사하는 예도 있다. 사람들은 이 시구가 조금 불편했던 모양이다. 단수와 복수라는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시인은 단수로 쓰고, 이후 필사자들은 ‘복수’로 쓴 것이다. 우리말에서 단수와 복수의 차이가 그리 명쾌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 큰 문제랄 수는 없다. 나와 우리가 혼용되는 일은 흔하다. 복수형 어미 ‘들’도 사실은 그 앞에 전칭 단어들(예. 모든, 다, 전부)이 있다면 사용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에서는 단수로 쓰는 것이 오히려 특별해 보인다. 시인은 그 앞에 이미 ‘모든’이라는 말을 썼다. 따라서 뒤에 ‘들’이 있든 없든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시인이 상상하는 것이 단수라면 이 경우 의미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모든’을 맨 앞에 씀으로써, 이 말은 ‘죽어가는 것’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대하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하나씩 모인 전체를 전제한다. 그저 ‘모든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로 존재하다가 모든’으로 모인 것들이었을지 모른다. 시인은 ‘죽어가는 것’ 하나하나를 보고 그것들이 한 데 모여있는 것에 시선을 둔다. 이제 시인이 ‘사랑한다’는 말을 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첫 문장, ‘괴로워한다’와 대응했을 것이다. ‘사랑’이 ‘괴로움’이다. 괴로워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죽어가는 것’을 하나하나 자기 마음에 담아두고, 괴로워하며 사랑한다. 중요한 것은 이 죽어가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과거가 부끄럽고, 괴로웠다. 그렇게 살아오고 살아가는 것이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지 않아’ 괴로웠다. 시인은 지금 누구보다 자신을 자신이 사랑하지 못한 것을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성찰한다. 시인은 이 구절에서 프락시스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어지는 ‘그리고’와 A′ 문장이 도드라진다. A′는 이렇다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몇 번 읽어봐도 ‘그리고’는 ‘그리고 난 뒤’라는 시간 이어짐으로 읽는 것이 좋겠다. 그걸 가정하고 읽으면, ‘나한테 주어진 길’은 다름 아닌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과 곧바로 연동된다. 더 멀리, 시의 출발인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고 분투하는 삶’까지도 이어진다.


한편, ‘주어진 길’이라는 말속에서 그 길은 자신이 만들거나 의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다. 물론 여기서 ‘길’은 전적으로 현실이면서도 동시에 상징, 메타포로서 기능한다. 자신이 직접 살아온, 살아가야 할 삶, 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아우른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그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다짐한다. 결의다. 다시 괴로워할지도 모를 그 길을 감당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렇게 그는 걷고 걸을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길을 걷는 시인이다. 그는 뛰거나 서두르거나, 다급해 하지 않을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로 쓰고 있는 시어는 그가 걸어가는 걸음을 투영한다. 자기 운명을 기꺼이 자기 걸음으로 재현한다. ‘~겠다’라는 이 표현이야말로 ‘괴로움’과 ‘사랑해야지’라는 자기 결의를 극한까지 심화시킨다. 지금도 걸어왔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걸어가야겠다는 자기 고백이 여실히 묻어난다. 그렇다면, 그가 걸어가겠다는 그 길은 결국, 별과 하늘 앞에서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는 삶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자기 실존을 사랑하는 절정을 향해 시를 힘입어 전진하는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이 시를 되뇌면서 오늘, 이 시의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이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에 새삼 주목한다. 자기 실존의 괴로움에 대해 첫 문장은 회고로, 두 번째 문장은 전망으로 새롭게 관조한다. 지난날도 자기를 디딤돌 삼아 앞으로 더 전진하는 삶을 살아갈 다짐이 선명하다. 시의 배경에서도 이런 마음이 읽힌다. 1941년 말, 이제 시인은 고국을 떠나 적국인 타국으로 떠날 참이다. 고향 용정에서 보낸 하루하루, 낮과 밤에 그는 숱한 자기 결의와 고백, 다짐을 반복한다. 별과 하늘을 보며 이제 자신을 억누르는 세계로 나갈 것이다. 거기는 어쩌면 더는 ‘죽어가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일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고국의 아픔을 외면하듯 벗어나려는 자신을 보면 괴로움이 극에 달한다. 하지만 그는 그 죽어가는 것을 괴로워하고, 사랑하기 위해, 운명처럼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한다. 그 괴로움이 곧 사랑하는 증거라는 것을 스스로 일깨운다. 그렇게 누구보다 자신을 다독인다.


상상해 보면, 그는 지난날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자신의 ‘시’로써 ‘모든 죽어가는 것’, 곧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 세계가 죽어가는 시대에 자신도 덩달아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별과 하늘 앞에서 그런 자신을 사랑하려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 곧 세계를 사랑하는 자이고, 그 사랑이야말로 죽어가는 것을 괴로워하는 불안으로 자기를 내던지는 것이리라. 그가 해협을 가로지르는 배에 올라탄 이유를 내가 알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는 스스로 괴로워질 것이 뻔한 땅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셋째 문장이 시인의 괴로움을 더욱 극대화한다고 읽힌다.

3. 셋째 문장 감상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제 시인은 숨을 한번 고른다. 행을 하나 건너뛰어 자기 마음을 고스란히 표현한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자기 고민이 깊어지고, 자기 사랑이 더욱 짙어가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그는 이 마지막 문장을 쓰면서 ‘괴로워’하는 회한과 ‘사랑해야겠다’라는 다짐에 뒤섞인 자신을 보고 있었을 것 같다.

마침내 그의 마지막 문장을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반복해서 읽는다. 걸으면서, 앉아서, 생각하면서 말없이 쉬지 않고 되새긴다. 그의 떨리는 손이 떠오른다. 깊은 호흡 소리도 들린다.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그는 어둑한 밤 안에 들어가 시를 쓴다. 자기 길은 이미 주어졌다. 이제 앞서 써 두었던 시구에서 두 단어를 다시 꺼낸다. ‘별’과 ‘바람’이다. 나는 그가 ‘하늘’을 꺼내지 않은 것에 조금 의아해했다. 어쩌면 이 마지막 구절이 그에게 ‘깊은 밤’과 검은 안식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늘은 더는 자기 삶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쓴 앞 대목에서 ‘별’은 ‘마음’과 이어졌었다. ‘바람’은 여린 생명에 맞닿아 살랑이게 했다. 이렇게 시인에게 별과 바람은 자기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건드린다. 그런 점에서 별과 마음은 시인의 안에서 상관된다. 여리기만 한 생명, 하늘 앞에 부끄러워하며, 죽어가는 자신 말이다. 별과 바람은 그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미장센일 수도 있다. 특히 바람은 생명을 어루만져주는 힘이라는 은유도 가능하다. 따라서 마지막 시구에서 시인이 ‘별이 바람에’라고 쓴 것은 주어와 부사구가 어울리지 않는 내용적 비문이지만, 오히려 사람의 마음이라는 관점에서는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이다. 이런 이해는 서술어를 되새겨보면 명확해진다.


시인은 ‘스치운다.’라고 썼다. ‘스친다’를 현재 사역형같이 표현한 것이다. 문법적으로 ‘~나다’라는 지금 일어나는 동작을 묘사한다. 그렇다면 이런 표현은 ‘오늘 밤에’라는 시제와 상응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이다. 사역형(물론 이것을 문법적으로 단정하기에는 여러 개연성이 존재한다) 즉 다른 이에게 동작의 결과가 영향을 미치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시키는 것인가? 별이 바람에게, 아니면 바람이 별에게? 어느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또한, 별과 바람이 이 시에서 같은 역할, 즉 시인을 다독이거나 일깨우는 도구라면, 이 둘을 다르게 배열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더군다나 이 마지막 시구에서 시인 자신의 모습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어느새 그는 ‘관찰자’의 자리에 있다. 별과 바람이 이 묘한 조우를 그는 관찰하는 것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 신비한 천체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시인이 한 가지 사실을 상상했을 것 같다. 즉, 시인은 별을 잎새로 바라보고, 그 잎새에 일었던 바람이 지금 별에도 맞닿은 것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했던 시인은 관찰자가 아니라 별에 이입될 수 있다. 즉 별이 곧 시인이 된다. 그렇다면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말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이 다시 투영된 구문이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시구는 시인이 관찰자에서 묘하게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수동형 같은 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리하면, 이 구문에서 마지막 동작은 처음 주어에게 영향을 준다. 이 문장에서 첫 주어는 ‘별’이고 서술어는 ‘스치운다’이다. 별은 곧 시인 자신이라면, 시인은 바람에 스치움을 다시 당한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별’은 시인의 경외감의 대상이었는데 어떻게 다시 시인과 일치할 수 있을지, 둘째, 별이 스치운다는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첫째, 별은 곧 시인인가라는 문제는 시인의 다른 시들에서 보자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시인에게 별은 하늘과 다르다. 그것은 동경의 대상이자 곧 친구이며, 삶의 방향이기도 하다. (별 헤는 밤). 따라서 그 별이 시인 자신이 되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달리 보면, 시인이 도달하고 싶은 어떤 동경의 세계를 상징할지도 모른다. 마치 어린 왕자가 떠나온 소행성 B612일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다른 면에서 시인에게 별은 하늘 자체와는 다른 세계다. 시인에게 하늘은 ‘우르러’야 할 대상이지만, ‘별’은 노래할 수 있는 친근한 대상이다. 멀리 하늘에 있으면서도 바람에 스친다는 것이 보일 정도로 근접해 있기도 하다. 이 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사이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다짐이 자리한다. 다시 말해 하늘은 묵직하게 거기에 놓여 근접하기 어렵다면, 별은 유연하게 시인의 삶에 유영하듯 출입하여 친근하게 오가는 대상이다.


둘째, 스치운다는 의미다. 이 말의 ‘우’가 서로 영향을 받는 동작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문장의 의미는 두 요소가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별이 스치게 하다’라는 허용, 다른 하나는 ‘별이 스침을 당하다’라는 강제의 의미다. 나는 걸으면서 이 구문에 부사구 ‘바람에’를 넣어 떠올려보았다. 사실, ‘바람이 별을 스친다’.라고 했다면 선명했을 것이다. 바람이 하늘에 떠 있는 별 곁을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서정적인 묘사다. 하지만, 시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은유도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이 상상했을 구문을 나도 떠올려보면, ‘바람이 별 옆을 스치게 하고 동시에 별은 바람이 스쳐감을 당한다’라는 의미가 새록새록하다. 이렇게 읽으면, 이 표현은 시의 첫 문장 ‘잎새에 이는 바람’에 대한 정확한 대구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잎새가 겪는 바람이 이 마지막 문장에도 나타난 것이다. 동시에 ‘주어진 길’에서처럼 ‘주어진’이라는 수동형과도 호응한다.


따라서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말은 바람이 별에게 부는 모습이기도 하고, 별이 바람에게 다가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바람이 주체이고 별이 객체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한 구별이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별이 바람에, 바람이 별에 닿아 둘은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별’이 자기가 관조하는 대상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기 운명과 동일하게 되었다. 바람은 생명을 일깨우고, 자기 존재를 각성시키면서 동시에 자기 운명을 안내하는 힘이 되어버렸다. ‘스치운다’에서 ‘~우~’의 기능은 그래서 각별하다.

이제 끝으로 ‘오늘밤에도’를 살펴보자. 예상하듯 ‘~도’는 같은 사건의 반복이다. 그가 지내온 평생에 늘 만났던 ‘오늘 밤’마다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밤’에 ‘낮’을 떠올리고, 아침을 기다리는 습속을 간직했다. 별을 보며 하늘을 보고, 바람을 보고 별을 떠올린다. 시인의 시점은 대체로 ‘밤’을 기준으로 아침과 낮으로 향한다. 밤은 시인의 현실이며 과거이다. 아침과 낮은 미래이며 과거이다. 하지만 시인은 밤을 지나야 아침이 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에게 시는 검은 안식을 형상하는 삶의 도구다. 언제나 어둠 아래서 빛과 밝음의 세계를 내다보고 있다. 그에게 ‘시’는 그에게 주어진 길이며, 그가 끝내 사랑해야 할 이 불안한 세계, 특히 흔들리는 자기 자신이다.

이 구절에서 나는 유대교 철학의 ‘밤’을 연상한다. 밤은 단지 어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를 ‘검은 안식(Black Sabbath)’이라 부른다. 검다는 것은 완전한 어둠이 아니라 빛이 숨어 있는 어둠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윤동주에게 ‘밤’ 역시 완전히 불안에 함몰된 시간이 아니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며 오히려 안식하고 빛의 세계를 기다린다. 마침내 새벽에 틈입하는 빛을 따라 걸어간다.


이처럼 유대 철학에 견줘 볼 때 시인이 ‘오늘 밤에도’라는 것은 삶을 위협하는 어둠이 지속하는 현실을 투영한 시구다. 세계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시를 쓰는 밤일 수도 있으며, 시가 끝나는 아침일 수도 있다. 달리 보면, 일본 유학을 앞둔 시인 자신의 마음, 고향과 조국을 떠나야 하는 불안과 식민지 현실에서 시만 쓰는 자신의 유약함에 대한 회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에게 별은 그 어두운 밤을 비추는 밝음이며 자기 길을 향도하는 등대이다. 자기 성찰의 도구이다. 이는 유대 철학에서 어둠 속에서 진정한 신성함을 발견하고 내면의 평화를 얻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구절에서 ‘밤’은 시인의 불안한 현실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별'을 통해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시간으로 변모하는 신비로운 사건이다. 나아가 시인에게 ‘시’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검은 안식’을 제공하는 도구이며, 유대인들이 어둠 속에서 토라를 연구하며 내면의 힘을 얻는 것처럼, 시인은 밤의 별을 통해 힘을 얻고 다음 날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이처럼 이 시에서 ‘밤’은 유대 철학의 전통에 근거할 때, 단순한 시간적 배경을 넘어, 불안을 극복하고 내면적 평화를 추구하는 신성한 성찰의 시공간이다. 불안을 짊어진 채 인간 실존의 완성에 이르려는 영성의 헤테로토포스이다.

4. 「서시」의 마지막 기록-윤리적 실존

이제 마지막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시인 윤동주가 자기 첫 번째 시집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맨 마지막에 썼다는 것을 항상 상기한다. 서시(序詩)는 마지막에 쓰고 모든 시 앞에 두는 자기 고백이다. 시집을 시작하는 시. 이 시는 자기가 남겨놓을 ‘시’ 열아홉 편에 대한 회고였으며, 전망이었다. 시인은 자기가 삶을 걸었던 ‘시’를 모아 세계에 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때 시인은 희망을 품고 이 서시를 남겼다. 시인은 시가 남겨질 때마다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했었을 것이다. 그것은 비록 실패 같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 편 시가 태어날 때마다 미세한 바람에도 괴로워해야만 했다.

동시에 시인에게 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담아 둔 자기 고백이다. 이제 자기 시는 ‘죽어가는 것’이다. 시인은 그 죽어가는 시를 괴로움같이 ‘사랑하겠다’라고 다짐한다. 그뿐 아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인’의 길을 시와 함께 걸어가겠다고 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을 것이다. 그에게 시는 삶을 견인하는 지고한 힘이며, 토대이다. 그가 걸어온 길은 가볍지 않았고,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시로써’ 어둠을 밝히려 한다. 시인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어두운 밤에 빛나는 별을 보며 그 마음에서 시를 꺼낸다. 그 별에 바람이 스쳐가고 별이 바람을 스치우게 한다. 잎새에 그랬던 것처럼 별에도 파동이 일었을까? 아니 바람은 별로 인해 추동했을까? 시인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남긴 시들은 이제 바람을 흔들어 잎새에 일게 하고 마침내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삶을 일깨울 것이다. 그가 이듬해 시를 마음에 품고 몸 하나로 현해탄을 넘어 밤의 나라, 군국에 물들어있던 땅으로 고요하게 밀고 들어갔듯이 말이다.


오늘 나는 서시를 읽으며

‘죽어가는 시’로써 죽음을 이겨냈던

시인 윤동주를 마음에 다시 품는다.


그는 지금도

불안함 속에서 자기 실존을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싶은’ 용기로 되찾았다. 생각해 보면, 서시에 반영된 그 시대 시인 자신의 시대 불안한 실존은 국가와 세계의 위태로움과 분리될 수 없었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영락없이 하늘과 땅과 바람과 별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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