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나의 한 단어 60-365

by 푸른킴

가볍게 발소리를 내면서

가만가만 걷는 소리


1.

며칠 전 가을 캠프,

아이들과 함께

도랑을 가득 덮은 낙엽 밟으며

나란히 걸었다.

푹신한 낙엽 위로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엇갈리는 소리마저

듣기 좋은 화음을 만든다.

자박자박

작, 자박―자박―


2.

‘자박자박’

강릉 바닷가 해변

숲 속 낙엽 밟다가

바닷가 몽돌 자갈길

천천히 걸어도 들을 수 있다.

누구나 들었을 소리일 텐데

사라지지 않게

살려둔 마음

고맙다.


3.

‘자박자박’

이 소리에서 계절의

살가운 초대가 들린다.

기꺼이 소리에 다가가

발바닥 아래 작은 자갈들,

말없이도 살갑다.


‘자박자박’


나는 소리를,

소리는 나를

머뭇거리지 않고

서로를 경청한다.

소리 점점 깊어지면

걷던 걸음 멈춰

몸 기울여

그 소리 뒤따르면

마치 꿈속에서

산들바람 길

자근자근 걷는 즐거움,

손끝에 닿는다.


4.

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도 있다.

‘자박자박’

척박한 땅바닥을 힘주어 걸어야 하는 긴장감도 엿보인다.

사전에 실린 故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한 구절,

“찬 바람에 굳어진 땅을 자박자박 밟는 발소리도 들려온다.”


이 짧은 문장 속

자박자박,

걷는 이의 속마음과

시대의 감춰진 정서가

차갑고 단단한 겨울 땅 밟는 소리에 실려 온다.

굳은 땅 밟을 때마다

생존의 의지 단단해지고,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동토 같은 현실을 밟는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민초의

견실한 삶의 의지,

빈말이 아니다.


5.

흐리던 날 저녁까지 이어졌다.

가을비가 드물어진 요즘

빗길 걸었던 기억이 가물거려서

창밖 이팝나무 사이로 난 휑한 길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비가 내리면, 계절은 빨리 늙어갈 텐데

겨울보다 비 내리는 날 먼저 오면

서둘러 낙엽길 찾아가

그사이에 숨어 있는


‘자박자박’


저 소리

찾아보련다.


그러니 그대도

삶의 굳은 땅, 굳게 밟고

낙엽, 낙엽― 자박자박

소리 따라 계절의 끝까지

당차게

함께 걸어가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걷는 기도 詩 14(끝). 너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