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에서 오감(五感)으로: 특히 촉각을 곤두세워”

- 2025 나의 월간 캠핑 후기 (25-1110 2박 3일)

by 푸른킴
"오감(五感)을 열어 창조주의 통치 의지를 체득하다: 한 그루 촉각수(觸覺樹)로 서 있는 광야의 예식“

2025년, 저는 매월 2박 3일의 캠핑을 통해 스스로 설정한 한 과제를 실천해 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을 ‘즐기는’ 것을 넘어, 이 세계에 새겨진 창조주의 손길을 오롯이 ‘관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태도는 우선 청년 예수가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느냐“(누가복음 7:24)라고 물은 것에 대한 저의 반응입니다. 다음으로는 장자(莊子)의 ‘찰기시(察基始)’를 내 삶에서 체험해 보자는 뜻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캠핑은 이제 늦가을과 초겨울의 경계까지 왔습니다. 이번에는 집 근처 캠핑장에서 2박 3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다양한 캠핑을 보내면서 눈과 손, 또 온몸으로 경험한 것들이 있습니다. 강물에 반짝이는 햇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 색 바래가는 풀잎, 그리고 그 곁의 다정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저는 이 모든 것을 촉각(觸覺)으로 곤두세워 접촉하려 했습니다.

지난해 캠핑에서는 한강 작가의 소설을 다시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채식’을 '햇살을 먹는 식사(彩食)'로 해석하며, 인간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나무의 삶‘을 통해 오히려 창조주의 은총 아래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이 글은 평범한 캠핑 후기이지만, 이 안에는 피조 세계 안에서 대면하면서 또는 대면하지 못한 채 일어난 여러 내적 논쟁을 스스로 마무리 짓고 피조물의 책임을 각성하는 성찰입니다. 그리하여 내 삶이 숲의 나무처럼 이 세계에서 햇살을 받으며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촉각수(觸覺樹)'처럼 살아가겠다는 ’광야의 고백‘입니다.


올해의 생활: 월간 캠핑

올해 나는 두 가지를 계획했습니다. 매일 한 편의 논문을 읽는 일과 함께 매월 한 번, 2박 3일씩 캠핑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중 논문 읽기는 지난 8월 말, 무더위를 끝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쓰는 일도 힘들지만, 그것을 읽어내는 일도 가볍지 않았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를 배워가며 읽는 일이 더위와 맞물려 빠르게 지쳐갔습니다. 몸을 관리하고 회복해야 할 처지여서 잠시 쉬어야 했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그 정도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말해두고 싶은 것은 글 한 편 써내는 데 모든 힘을 다 쏟아붓는 이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제 마음입니다. 그들 덕분에 저의 지적 호기심이 조금 더 깊고 넓어진 것 같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글 읽어내는 일은 그리 부담되지 않습니다. 기회 되는 대로 새로운 글들을 다시 읽을 생각입니다. 읽기가 힘은 소진되지만 동시에 충전되면서 탄탄한 지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논문 읽기가 우여곡절을 겪는 와중에 다행히 캠핑은 순조롭게 진행했습니다. 글을 읽는 것보다 몸을 쓰는 것이 제 몸 상태에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과 가을을 넘어섰습니다. 빠르게 초겨울로 들어섰습니다. 앞산의 나뭇잎들은 마지막 퇴장을 위해 더욱 아름답게 자신을 치장하고 있습니다. 경험한 분들이야 더 잘 아시겠지만, 개인적으로 겨울로 가는 길목 캠핑이 다른 계절보다 운치 있는 것 같습니다. 약간 쌀쌀한 기운과 텐트 안의 듬성듬성한 온기, 색을 갈아입는 산의 풍경이 절묘하게 조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아예 쉴터 같은 겨울 텐트를 설치했습니다. 그 덕분에 아침저녁 차가운 바람에도 따뜻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젯밤 텐트를 세우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잡은 뒤 귀한 손님들과 차 마시는 시간을 즐겼습니다. 늦은 밤, 모두 돌아간 뒤, 더 차가워진 바람이 숲을 휘도는 시간, 적막한 사위가 아주 맘에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에 남은 잎들이 속절없이 떨어지며 텐트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안락한 집에서 누리는 평안함과 사뭇 다른 안식이 이 늦가을 밤, 그리고 다시 아침, 마치 한겨울 바람 소리처럼 숲을 타고 반가운 손님처럼 스며듭니다.


캠핑의 묘미: 낯선 익숙함 그리고 텐트를 통한 '집' 개념의 재정의

캠핑의 묘미는 언제나 낯선 익숙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번 같은 일을 해도 다르고 다른 일이라 해도 어느새 익숙한 듯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얼핏 매번 같은 장소여서 조건과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사실은 언제나 전혀 다른 공간입니다. 내가 달라져 있듯, 캠핑 역시 매번 새로운 사건입니다. 그 새로움은 나에게 ‘홀로 있음’에도 즐거움을 제공하고, 이 세계에서 한 점에 불과한 내가 여전히 생존 가치가 충만한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새롭다고 하는 것은 이날이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도 나에게 주어진 시공간을 충실하게, 당당히 살아내고 있음을 격려하는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제저녁 즉흥 모임은 몇몇 친구처럼 살가운 분들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저녁 공기를 벗 삼아 오붓하게 둘러앉아 한참 수다를 떨다 돌아갔습니다. 빈손으로 오지 않고, 연시를 먹기 좋게 잘라, 가지런히 담아왔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텐트 안 분위기가 더욱 화사해졌습니다. 연시의 잘 익은 맛은 물론이고 그 정성에 덧입혀진 이야기 덕분입니다. 나는 더욱 짙은 해방감을 느낍니다. 서로에게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견실하게 잇대어 있는 마음이 만나면 가벼운 말도 한없이 의미 있는 대화로 펼쳐지기 마련입니다. 나는 그 틈에 가래떡과 고구마, 레드 애플차를 대접했습니다.


텐트 생활은 집의 삶과 다릅니다. 그러나 가림막 하나 세웠다 해도 사람이 찾아오고, 작은 먹거리가 끝없이 이어지고 괜한 이야기가 깊어지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평안한 안식처가 된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텐트를 터 삼아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내 집’을 다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개념보다 ‘집은 건물의 외형보다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이 한쪽 팔 닿을만한 간격을 유지한 채 경계 없는 다정함을 샘솟게 하는 곳이다’라는 것입니다.


캠핑의 기본 방식: 오감을 통한 관찰

맑은 하늘 덕분에 사위는 깨끗하고, 풀빛은 마지막 진한 초록을 쏟아내고 숲길은 고요했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습니다.


지난 세월 나의 캠핑은 한 가지 생활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오감을 통한 관찰입니다. 계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간 곳곳의 풍경을 가만히 눈에 담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가벼운 마음으로 짧게 멈추어 섭니다. 이것 역시 일종의 여행입니다. 또한, 캠핑하는 나의 지극히 사적인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찰은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하는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즐거움인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의무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창조 세계를 무상으로, 마음껏 즐기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피조물에 깃든 하나님의 손을 직접 관찰하는 신앙의 발현입니다. 즐김은 곧 관찰이며 관찰은 곧 나의 신앙과제입니다. 얼핏 어울리지 않는 과제 같지만, 나에게는 어느덧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것이 된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찰하는 일은 저의 신앙의 토대입니다. 관찰은 오감을 모두 활용해야 겨우 성취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자주 '즐거움이 진지한 관찰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캠핑을 반복할 때마다 되새깁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 틈나는 대로 소풍 같은 캠핑을 즐기겠지만, 부디 이 나들이를 통해 무의식 중에라도 이 세계 속에 깃든 창조주의 손길을 나의 오감으로 더 깊고, 넓게 체득하면 좋겠다.’라고. 세계의 관찰은 야훼 신앙을 가진 나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관찰이 있습니다. 바로 ‘나를 관찰하기’입니다.


2025년 11월: 캠핑 독서 추억과 나무의 삶

2025년 11월 10일, 나는 또 한 번 피조물의 변화를 온몸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맑고 파란 늦가을 정취가 화려하게 빛났습니다. 무엇보다 햇살이 좋았습니다. 강물이 윤슬처럼 반짝이는 햇빛이 살아있는 날, 조금 거센 듯하지만 바람도 몸에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지난여름 무더위로 올해 단풍은 예년보다 곱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건너편 산부터 텐트 바로 아래까지 지긋하게 색이 스며들고 있어 다행입니다. 낙엽도 평소대로 행복하게 나뒹굴고 있습니다. 이 캠핑장은 요즘 가을다운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어 아주 좋습니다.

이런 은총의 공간, 파란 하늘 아래에서 나는 홀로 머물며 나를 관찰합니다. 이번에 나는 내가 ‘한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지난해부터 이어져 온 질문에 대한 작은 결실입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작년 이맘때 우리나라의 한 소설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라 세간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물론 아무리 좋은 상이라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호불호는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작가의 글이 신앙을 가진 나에게 한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책 ‘채식주의자’ 때문입니다.


이 책은 세간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은 ‘채식’을 소재로 한 사람의 아픔을 작가의 문학적 감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채식’은 채소를 먹는 사람, 육식을 거부하는 사람, 그리고 끝내 ‘나무’가 되어버린 현실의 사람을 상상력을 통해 문학 안에서 극적으로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상상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현실답습니다. 소설의 끝으로 갈수록 나무가 된 사람은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인간이지만 나무로 존재하는 사람이 거기 있습니다. 온몸에 햇살을 받아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잎을 내는 나무로 살아가고 싶은 슬픈 욕망을 아예 실현해 버립니다.


그런데 저는 ‘채식’이라는 말을 특히 더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아주 인상적인 말이어서 이 단어와 소설의 주제를 연관 지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된 것입니다. 오래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채식’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새롭게 생각할 시간이 좋았습니다.


‘채식(菜食)’은 분명 ‘채소’만 먹는 식단입니다. 그런데 ‘채식(彩食)’이라 적어보면, 그것은 ‘햇살, 빛을 먹는 식사’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채식주의자는 ‘햇살 먹는 사람’인 셈입니다. 그렇게 보면, 소설 속 한 주인공은 뿌리를 내리고 한 곳에 머물러 빗살처럼 쏟아지는 햇살을 수동적으로 받아야만 하는 ‘나무’ 같은 삶을 끝내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달리 보면, ‘채식(彩食)’은 완전히 수동적인 삶입니다. 햇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햇살을 받아야만 하는 나무는 스스로 자기 자리를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해가 나고 맑고 푸른 날에도 그 자리에, 해가 없고 바람이 거세고, 비가 내려도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슬프게도, 맑은 공기가 자기 주위에 가득할 때만 나무는 햇살을 먹고 양분을 얻어 성장할 수 있습니다. 햇살 쏟아지는 맑은 날을 장담할 수 없지만, 이 인간이 물화(物化)되는 시대에는 차라리 ‘주어지는 은총’에 자신을 맡겨 살아가는 나무가 오히려 인간답다는 것이 불편한 듯 공감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 소설이 함의하는 논지도 예전보다는 훨씬 더 세밀하게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이 소설에서 작가는 ‘피조물로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고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여진다면, 차라리 한 그루 나무가 낫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나의 경우, ‘인간은 완전한 피조물이기에 창조주를 인식한다면, 상호 존중과 온전한 사랑으로서만 비로소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다.’라는 말로 바꾼 것도 자연스러웠습니다. 창조주를 향한 신앙으로는 이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삶이 오히려 은총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자유 과잉 시대에 이런 ‘나무의 삶’은 그래서 역설입니다. 내가 나를 성찰하게 된 근본적인 관찰입니다.


캠핑에서 되새기는 창조질서와 통치 의지

나는 개인적으로 창조주 야훼를 신앙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나는 홀로 있으면서도 사람들과 더불어 사회관계적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마치 한 나무가 여러 나무와 어울려 숲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해마다 캠핑을 나다니는 일은 연어가 거친 강물을 거슬러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본향을 향해 역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한 그루 나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캠핑의 이유와 목적은 그리 거창해지지 않습니다. 나무이기에 나는 이 숲에 이르러 본향을 상기합니다. 그것은 광야로 나가 자기 생존의 의의를 추체험했던(수련이나 훈련이 아닙니다)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전제 아래 이번 캠핑에서 나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반복해서 되새김질했습니다.


첫째, 이 캠핑은 숲의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계절마다 창조주가 아름답게 빚어낸 질서를 온몸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의 숭고한 뜻을 알아채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손수 빚어낸 세계 안에 침잠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이 캠핑은 계절을 따라 특히, 오감(五感)을 모두 활성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숲과 하늘과 강물을 보고, 바람과 새와 아기들의 소리를 듣고, 나무와 풀의 향기를 맡고, 맛난 음식을 맛보고, 이 창조 세계에 흐르는 좋은 기분을 내 온몸으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나는 이 캠핑에서 내가 최후의 악수를 할 때까지 머물러야 할 숲의 시공간을 물안개 피어오르듯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둘째, 캠핑은 창조주가 이 창조 세계를 통치하고 나는 그 통치를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이 통치는 창조주의 강한 저항 의지입니다. 하지만 그 의지는 갈수록 눈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확신하기는 이 의지에는 소풍 갈 숲이 점차 사라져 가는 어긋난 세계가 본향의 아름다움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지를 알아채려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 캠핑에 담겨있습니다. 이 점은 솔직히 나 같은 신앙인에게는 힘겨운 과제입니다. 창조주가 숨어있듯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그의 존재를 일깨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무는 우리 시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래전, 시편 24편을 노래한 한 시인도 이 점을 스스로 일깨웠습니다. 그의 시 앞부분(1~2절)에는 강과 바다 한복판에 자기 터를 세운 창조주 야훼가 있습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개역개정, 시 24:1~2)


여기서 바다와 강은 오늘날 어그러진 세계, 세계를 어그러지게 하는 모종의 힘을 은유합니다. 이 터에다 창조주가 왜 자기 세계를 이뤘는지 이 시는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를 읽는 이는 이 건축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이 창조 세계 속에서 잘 관찰하고 찾아내야 합니다. 야훼가 무엇을 저항하고 어떻게 통치하려는지 그 숨은 의도를 면밀히 관찰해야 합니다. 비록 그 통치 흔적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도 몸을 기울여 들으려 하면, 찾으려 하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어렵고, 향기도, 맛으로 분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몸으로 접촉하기 어렵기에 당연히 관념적으로 생각만 하다 끝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관념이라도 그것을 반복해야 끝내 실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인내하는 관념은 결국 ‘실재(實在)’로 눈앞에 현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그런 점에서 캠핑이라는 계절 예식이야말로 나에게는 관념을 실재화하는 좋은 영성의 놀이터(장場)입니다. 따라서 이 숲으로의 귀향은 나에게는 하나의 예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이 세계에 스스로 어떻게 저항하고 있는지 내 온몸의 오감을 활용하여 체감하는 예배입니다. 그 체감된 감각을 가지고 다시 생생한 일상 공간으로 복귀하는 순례의식입니다. 이것이 내가 캠핑을 하기 위해 광야로 ‘나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피조 세계에 대한 촉각의 강화

이번 늦가을과 초겨울의 경계에 서 있는 동안에도 관찰과 경험을 위해 ‘촉각’에 좀 더 집중했습니다. 촉각이란 ‘접촉을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온몸에 와닿는 피조 세계의 흔적을 세밀하게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촉각 각인은 창조주가 그 세계를 어떻게 제압하고, 또 어떻게 저항하는지 살펴서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는 지적 순례의 한 여정입니다. 나의 여정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첫째, 햇살 아래 몸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좋습니다.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 바람 앞에 몸을 정면으로 마주해도 좋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보는 것입니다.
셋째, 풀 위에 온몸으로 누워보는 것도 좋습니다. 색 바래가는 풀잎을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사람 옆에 멀리 떨어지지 않는 간격을 두고 온 마음으로 서 있는 것도 좋습니다. 가을이면 더욱 성숙해지는 사람에게 온몸으로 기대 보는 것입니다.


나의 캠핑은 이런 여정으로 햇살과 바람과 풀과 사람을 마주합니다. 촉각을 통해 숲 속에 스며듭니다. 동시에 숲에 서려 있는 창조주의 통치 의지를 직접 감촉하는 행위 예전입니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통치 의지를 내 몸 안에서 다시 추출하는 영성의 로스팅이며, 드립입니다. 하지만 이런 여정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의 캠핑의 의의: 한 그루의 촉각수처럼

야훼가 이 창조 세계를 주도적으로 저항하듯 통치한다는 것을 답할 수 있는가?입니다. 어렵지만 그래도 한 답을 모색해 본다면, 그것 역시 계절을 따라 캠핑을 반복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으로 살아가는 동안 모든 세계는 창조주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계절이 달라질 때마다 소풍을 즐기며, 그 시공간에서 ‘오감’을 활용하여 창조 세계에 새겨진 창조주의 창조질서 의지를 주밀하게 관찰하는 일은 멈출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일이 나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곧바로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삶에는 이 캠핑의 가치를 능가하는 더 중요한 사건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캠핑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삶에 심각한 위협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캠핑과 같은 일이 그리 특별한 사건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캠핑은 아주 가벼운 간단한 의식입니다. 가만히 앉아 하늘을 보거나 나무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또 이곳저곳 가볍게 산책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처럼 캠핑은 사수한 일이라는 비판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소한 것이 아주 소중한 예식인 이유 또한 분명합니다. 캠핑은 내가, 우리가 인간이면서도 동시에 이 세계에서 하늘의 은총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한 그루 나무라는 것을 짧고 굵게 일깨워줍니다.


숲 속 나무야말로 창조주의 통치 방식이 자연스럽게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 나무는, 내가 사는 동안 이 소풍을 통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를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이 이 세계에 어떻게 대항하는지 체득할 수 있는 ‘촉각수(觸覺樹)’입니다. 그것을 위해 오감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 나무가 인간답게 잘 자라도록 햇살과 바람과 맑은 공기와 비가 쏟아지길 기도합니다.


결. 캠핑의 의의-창조질서 유지를 위한 맹세

다시 바람이 가볍게 불어 스치는 밤, 나의 인생의 숲에 다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이식해 두려 합니다. 내가 캠핑하는 이유도 다시 새겨둡니다. 그것은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당연한 책임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기적으로 캠핑을 나가는 이유 역시 바로 이 당연한 이유와 피조물의 책임을 창조주 앞에 새롭게 맹세하기 위함입니다. 맹세란 “모든 논쟁을 마무리 지어 확정해 주는” 자발적 선택입니다. 캠핑을 통해 나는 창조주의 창조질서 유지에 대한 의지, 그의 섭리에 대한 내면의 모든 논쟁을 마무리 지어 스스로 확정합니다. 나는 이 세계 사물 위가 아니라 그들 옆에 한 존재로 나란히 서 있는 존재로 재정위 합니다. 세계와 나는 조화롭게 공존해야 할 평등한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공존재입니다.

이 캠핑은 계절의 변화를 따르는 나무처럼, 이러한 자기 고백이 갱신되는 광야의 생활 방식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메타시> 듣는 기도 詩 7. 죽음, 그 생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