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깨어나
달빛 아래 노란 석양
가로등처럼 밝혀주면
지친 나무들
한 걸음씩,
귀연(歸沿)ㅡ
초겨울 낙원
배경
서재에 오는 날이면 늦은 오후 4시경 둘레길을 걷는다. 11월이 되면 어둠이 빨리 내려앉아 오후 5시만 넘어도 숲길은 컴컴해진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동물의 울음 같은 소리가 들리고, 숲과 나무뿐인 오솔길인데도 등 뒤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하다. 한 번은 어미 사슴이 산 중턱에서 나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달빛이나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어둠의 결이 조금씩 풀린다. 낯설던 길이 익숙해지고, 발걸음도 주저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늦은 오후의 겨울 산책길은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고, 어둠이 다시 미약한 빛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는 놀이터와 같다.
그날은 길의 끝에서 나는 앙상한 겨울나무들 위로 길게 스며든 노란빛을 보았다. 그 실루엣들은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제각기 귀가하는 사람들, 혹은 본향으로 되돌아가는 어떤 군중처럼 보였다.
우연히 옛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떠올랐다. 다시 찾아 읽어보니 “새벽빛은 희미하여 한스럽기만 하다(恨晨光之熹微).”는 구절이 새롭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대 속에서도 어떤 희미함을 보았던 것 같다. 만감이 교차하는 자신을 시적으로 잘 표현한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어둠 속 귀향의 감정을 여명으로 읽고 싶었다. 희망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진
이 사진은 어둠 속에서 찍혀 전체에 짙은 진파랑(deep blue=깊은 슬픔의 바다 색)의 기운이 번진다. 초겨울 어스름에 흔히 나타나는 청람(靑藍)의 농도가 사진을 덮는다.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어, 검은 실루엣만으로 얽혀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구도가 나무를 더 길게, 쓸쓸하게 만든다. 나무가 마치 군중처럼 보인다.
이 사진의 중심에는 하나의 노란빛이 박혀 있다. 달빛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로등 불빛이었다. 이 빛이 사진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나무들이 만들어 낸 검은색은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짙다. 사진이 무게중심이 약간 기울어져 보인다. 하지만, 이 기울어짐은 오히려 어둠이 높은 곳에서 낮은 한쪽으로 흐르는 듯한 몽환적 분위기를 더한다.
전체적으로 이 사진은 움직이지 않는 나무들이 마치 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듯한 운동감을 품는다.
시어
이 사진에 어울리는 시어를 예상하면, 그 어감이 대체로 어둠과 관련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사진에서 어떤 희망의 빛을 읽었다. 무엇보다 그 희망은 사진 한가운데 담긴 불빛에서 기원한다. 내가 올려다본 시선에서 가장 한가운데 놓인 그 불빛은 나의 밤 산책을 안내하는 가로등이다. 안내 등이며 조명등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밤하늘에 오래전부터 나와 있던 달빛처럼 보였다. 길이 환해졌다. 이런 느낌 때문인지 나의 시어들은 자연스럽게 희망의 언어로 이어졌다.
어둠 깨어나: 낮에서 밤으로 가는 시간, 나는 이 밤의 도래를 어둠이 ‘깨어난다.’라고 읽었다. 어둠이 ‘내려앉는’ 것이 아니다. 어둠이 이제 아침처럼 몸을 일으켜 밤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둠은 새로운 역동의 시간이다. 어떤 존재는 몸을 쉬고, 또 어떤 존재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이런 대조와 교차가 이 시에 담겨 있다. 나는 어둠을 부정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은 생성과 회복의 헤테로토피아다. 이 시어는 검은 안식의 철학과 이어지는 대목이다.
달빛 아래 노란 석양: 이제 나는 사진의 중앙에 빛나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이 달빛일 수도 있지만, 아예, 어수룩한 달빛과 이 불빛을 분리했다. 그리고 불빛 자체보다 그 빛의 색을 강조했다. 노란색이다. 검은색의 배경에 노란색은 대비가 확실하다. 노란색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이 구문에서 노란 석양은 어울리지 않는 어법이다. 보통 석양은 붉은색으로 하늘에 퍼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나는 노란 불빛 하나를 ‘석양’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때 노란색은 ‘희망’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노란 석양’은 말 그대로 모순어법(oxymoron)이다. 석양은 지는 해, 즉 어떤 저무는 희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노랑이라는 의미를 따르면 이 구문은 희망에 더 기울어진다.
가로등처럼 밝혀주면: 노란 석양이 희망이라는 것은 그 불빛이 가로등처럼 밤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물론 대낮처럼 환하지는 않다. 하지만, 짙은 밤에서는 반딧불이도 밝은 태양 같다. 그런데 이 구문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가로등을 ‘노란 석양’과 연관 지었다는 점이다. 자연에서 비춰주는 달빛, 밤빛이 마치 사람이 세워둔 인공적인 가로등과 비유로 만난 것이다. 사실 내가 걷는 길에서 더 환히 빛날 수 있는 것은 인공의 등불이다. 그러나 그보다 나는 달빛과 가로등이 한데 어우러져 나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지친 나무들/한 걸음씩/귀연(歸沿)ㅡ: 나의 시선은 이제 나무들을 어떻게 표현할까에 닿아 있다. 우선 나는 이 나무들이 퇴근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조금 처진 몸, 빠르게 걷고 있지만, 마음과 몸은 이미 피곤해진 상태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한꺼번에 길로 나왔다. 모든 사람이 뒤섞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실루엣만 남았다. 역광도 그러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색과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그 지친 사람들 같은 나무들이 한걸음 씩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흐릿한 몸놀림 속에서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의외로 ‘귀연’이다.
귀연은 ‘마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물길을 따라 걷는’ 모습이다. 그저 돌아감이 아니라 물길을 따라 걸어가듯 돌아가는 모습이다. 사진 속 나무들은 그런 귀연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들이 가는 곳은 희망의 샘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귀거래사>의 한 대목은 파(破) 관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연명이 남긴 자기 심정이다. ‘새벽빛같이 희미한 자기 존재’다. 그런데 나는 도연명의 심정과 달리, 이 어스름한 어둠에 놓인 나를 오히려 희망으로 나가는 존재로 인식했다. 검은 안식의 철학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귀연’ 뒤에 대시(ㅡ)를 두어 이 희망의 여운을 좀 길게 남겼다.
초겨울 낙원: 마지막 시어는 이 사진이 곧 초겨울에 누리는 낙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낙원이 겨울이라는 것이 이질적이다. 봄이나 여름, 심지어 가을의 정서가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바람이 쌀쌀하고, 어둠이 빨리 내려온 초겨울에 낙원을 상상했다. 계절이 바뀌는 전환기였기 때문이리라. 나뭇잎은 거의 떨어졌다. 얄팍해진 숲, 스산한 분위기의 숲길이었다. 이 어둠의 숲이 나에게는 낙원인 셈이다.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불빛’과 길, 그리고 희망으로 내 몸이 기울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시어를 통해 나는 내가 걷는 이 어둠의 길이 곧 ‘낙원’으로 향하는 길을 체험했다고 다시 말해두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나도 이 시어들을 모아서 ‘귀거래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향으로 되돌아가리라(來)는 자기 의지를 담은 도연명처럼 나도 낙원으로 회귀하는 나를 노래한 것이다. 나의 길은 밤이나 낮이나 ‘본향’이라는 낙원으로 나아가는 순례일 테니 말이다.
의도
이 디카시의 의도는 앞서 말한 대로 제목에 들어있다. 옛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것이기도 하다. 그는 절개를 지킨 관리였다. 어느 날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왔다. 그때 그는 설렘과 기대로 귀향길에 들어선다.
오늘 나도 희망의 숨결로 나의 밤길을 되새겨보고 싶었다. 세계의 어둠은 고요와 침묵과 불안의 시간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밤의 시공간은 오히려 ‘깨어남의 사건’이다. 그 밤길에 항구여일한 빛이 언제나 있다. 그 빛이 내 길을 인도한다.
사실, 옛 시나 현대 시에서 달빛은 길을 밝히는 보편적 은유다. 하지만 그런 은유보다 나는 오히려 희망의 전령으로 받아들인다. 마치 나에게 “돌아가라”라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 디카시에서 ‘귀연(歸沿)-’이라는 시어는 그런 권고를 함축한다.
나는 검은 실루엣으로 보이는 나무들에서 여름과 가을을 치열하게 보내고 겨울로 들어가는 모습을 읽는다. 그 나무들이 귀향의 길목에서 피곤한 몸을 멈춰 세울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도 고스란히 전이된다. 어쩌면, 한 걸음씩 걷는 걸음마저도 밤의 늪으로 빠져드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걸음이 역설적으로 ‘작은 회복의 리듬’이 된다.
하여, ‘귀연’은 그저 돌아가는 행위가 아니다. 계절과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의 리듬을 따라 되돌아가는 행동이다. 모든 것은 흐름에 따라 제자리로 돌아갈 때, 그 풍경이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는 어느 가요도 그런 미학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한편, 나는 이 디카시에서 나의 낙원이 ‘초겨울’의 시공간이라는 것을 표현했다. 산의 숲은 비워져 있으나 낯설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희망으로 출발하는 시작점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겨울 숲은 충만이 아니라 빈 곳이다. 비어 있음은 곧, 새롭게 현현할 봄날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빈 충만, 평온의 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낙원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귀거래사는 그 종착점이 본향, 근원이다. 어쩌면, 귀향은 막연히 돌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무엇을 따라 흘러가는, ‘돌아가려는 감각’ 일지도 모른다. 달빛 아래에서 비로소 숲의 생물들은 새벽을 기다리며 자기 자리를 되찾아 돌아갈 수 있다. 그것처럼, 나 역시 어둠에서 ‘빛을 인식하는 순간,’ 그때부터 귀향의 리듬을 따라 귀연의 흐름을 유지할 수 있다. 어둠은 삶을 소생하는 시공간이다. ‘깨어나는 사건의 장’이다. 생명의 회복과 충전이 일어나는 삶의 토대이다.
나는 이 디카시를 쓰며, 초겨울 숲길의 어둠이 단순히 내려앉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는 생명’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달빛은 내게 언제나 생존을 따라 귀향하는 신호처럼 다가온다. 인공의 가로등과 함께 길 위에서 나를 맞아주며, 지친 몸과 마음을 조용히 본향으로 돌려보내주는 힘이 있다. 게다가 낙엽을 모두 떨군 나무들의 앙상한 모습은 오히려 견고한 뼈대처럼 느껴졌다. 지친 것 같지만,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생명의 깊은 근육 같은 모습. 그 나무들도 달빛 아래에서 나와 함께 한 걸음씩 귀가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제목으로 명명한 ‘귀거래사’는 이 디카시가 그저 ‘돌아가는 글’이 아니라 ‘흐르는 귀가(歸沿)’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 이 초겨울에 조금 어둑한 시간에 가까운 숲을 한번 걸어보라. 그 숲은 비어 있지만, 그 비어 있음 속에서 노란 가로등 하나가 밝혀주는 길은 더 또렷해진다. 내가 초겨울을 ‘낙원’이라 부르는 이유다. 비어 있을수록, 잠잠할수록 인간의 근원적 행복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정리
나의 디카시는 짧은 분량의 시어를 구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함축적인 표현을 쓰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사진과 시어가 서로를 보완하여 의미를 확장하는 긴밀한 결합을 구사한다.
또한, 나의 디카시는 내가 추구하는 검은 안식의 철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와 함께 걷기라는 행위도 담겨 있다. 이번에는 귀거래사라는 옛 시, 귀연이라는 한자 조어, 초겨울의 시간 철학도 활용했다. 사진의 의미를 증폭하기 위해서다. 시어는 사진 읽기의 결과를 극대화하는 문학적 화장이다.
이번 나의 디카시는 사진의 현상학적 시선과 시어의 압축된 감각, 그리고 귀연(歸沿)의 철학적 사유를 하나의 순간에 포개기 위한 묵상의 산물이다.
“귀거래사.”
초겨울의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는 작은 빛은 귀향이 행위가 아니라 감각이며, 존재는 그 감각을 따라 흐름처럼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겨울, 나와 너와 우리, 그리고 세계는 그 빛의 미세한 떨림에 응답하며 자기 근원으로 조용히 회귀한다. 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