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8. 억새 가로등

by 푸른킴

태초에

어둠 가르던

신의 손처럼,


에덴을 감찰하던

*라하트 하헤렙처럼,


아침을 파수하는

“진주보다 고운 이슬처럼,”


오늘

죽음 같은 세계에서

경야(經夜)하는 벗, 가로등,


겨울 불꽃―


*창세기 3장 24절 ‘생명나무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번쩍이는 칼’

디카시 8. 억새 가로등.jpg

배경

나는 해 저물어가는 이른 밤에 산책할 때가 있다. 주로 가로등이 있고, 보도블록과 데크가 잘 깔린 공원길을 걷는다. 여름보다 겨울에 밤은 더 검게 보인다. 아마도 낮의 햇살이 찬 밤공기에 몸을 움츠렸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느 날, 1시간 정도 걸었다. 추위가 스산하게 몸에 스며들었다. 그 길의 끝에서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억새를 만났다. 그 위로 가로등이 있었다. 억새 위로 퍼지는 빛의 길을 따라 억새도 스스로를 활짝 열어주는 듯했다. 검은 하늘을 향해 옆으로 흔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걸음을 멈췄다. 가로등 아래 서서 억새를 향해 줌을 사용했다. 숨을 죽였다. 억새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곧 셔터를 눌렀다. 어둠 속 옅은 주황색이 선명하게 담겼다.


사진

억새를 클로즈업했다. 억새가 사진 한가운데 자리했다. 마치 불꽃 모양 같았다. 가냘프게 서 있었지만, 모습은 가로등을 닮았다. 노란 불빛의 황갈색이 살아나 밤하늘과 대비되었다. 포근함마저 주었다. 마치 바람이 불고 공기가 차가워지는 세계에서도 꿋꿋하게 자기 생을 살아낸 노년의 은퇴자의 모습 같았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억새를 역동적으로 찍기 위해 바람을 기다렸다. 눈높이보다 조금 낮은, 로우 앵글(Low Angle)을 활용했다.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적절한 바람이 불었을 때, 셔터를 눌렀다. 억새의 잎이 산들 흔들려 확 퍼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불꽃이었다. 아니 꽃불이었다. 덩어리 불처럼 솟아오르다 바람을 따라 화염처럼 흩어지는 잎이었다. 오른쪽 아래 어린 억새는 불꽃놀이의 불똥이 튀어 심긴 것처럼 보였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면 이 장면에는 세 개의 상징적인 빛이 들어있다. 그것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하늘의 검은색(삶의 터전), 억새의 황갈색(꿋꿋이 버텨낸 노란 생활), 그리고 프레임에 보이지 않는 가로등의 주황색(하늘의 조명)이다. 이 세 가지 색은 억새의 생애를 비추는 삼원색 같았다. 그것은 밤이 짙은 세계에서 평생 자기 삶을 불태운 한 노년에게 투영된 것이다. 이로써 이 삼색은 삶이 어둠 속에서 하늘의 조명을 받는 이미지를 완성한다.


사실, 색의 대비로 보자면 검은색을 배경으로 한 노란색은 언제나 뚜렷하다. 주황색 억새의 이미지는 밤하늘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마치 고대 히브리인들의 유명한 시(시편 23편)에 쓰인 “죽음 그림자”(히브리어로 찰마베트) 같은 세계를 떠올렸다. 일반적으로 억새는 ‘친절, 활력, 힘’, 나아가 ‘세월의 흐름=은퇴’라는 꽃말이 있는데, 이 사진의 대비는 그 점 또한 잘 살아난 것 같다.


이 사진은 구도와 형식 면에서도 하나의 기호처럼 보였다. 억새가 사진의 중앙을 수직으로 관통하고, 그 위로 검은 하늘이 넓게 열린 구도는 고대 히브리인들이 상상한 ‘궁창’에서 샘이 솟구치는 신성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억새의 가느다란 줄기가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면서 상승감과 고독하게 우뚝 선 모습을 잘 표현한다. 어둠 속에서 바람을 따라 흔들리면서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는 한 인간의 꿋꿋한 이미지를 강화한다.


이로써 이 사진은 옛 창조의 빛과 현대 문명의 가로등이 검은 밤하늘 아래서 만나 다시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정적을 배경으로 억새만 홀로 존재한다. 이 여백과 고독은 이 사진의 미학적 특징이다. 다시 말해, 이 사진은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줄기가 위로 뻗어 빛을 발하는 형상을 잘 보여준다. 억새는 ‘가로등’처럼 어둠 속에서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시어

1. 시어와 에크프라시스(Ekphrasis)

디카시는 사진이 강렬할수록 시어를 최소로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이 언어를 압도하는 경우, 시어는 보조적·보완적 장치로 머물거나 상호 보완하는 정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서 이러한 통념을 벗어나 고대 에크프라시스(ekphrasis)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즉, 사진을 해설하거나 간단히 보강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진을 보지 않고도 이미지가 재구성될 만큼 세밀한 시어를 구사했다. 이를 사진 이미지가 품고 있는 철학적·미학적 함의를 언어적으로 심화하고 확장하려 했다.


이처럼 시어를 전략적으로 배열함으로써 나는 사진이 제공하는 빛의 형상을 창조–에덴–이슬–현실에 위치시키고, 이 모든 것을 겨울 억새 하나에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이 시어는 사진이 함의한 어둠 속 빛의 계보를 엮어내는 데 이바지한다.


2. 4단 11행의 설계: 시간·공간·캐릭터·이미지의 네 층위

시어는 총 4개의 단락과 11개의 행으로 구성했다. 각 단락은 한 층위를 대표한다. 즉,

(1) 시간은 태초 → 에덴 → 아침 → 오늘로, (2) 공간은 우주적 기원 → 추방된 동산 → 새벽 들판 → 내가 걷는 길 위로, (3) 캐릭터는 신의 손 → 불칼(라하트 하헤렙) → 이슬 → 가로등으로, 끝으로 (4) 이미지는 창조의 빛 → 경계의 불꽃 → 진주의 이슬 → 억새의 겨울불꽃으로 이어진다. 이런 네 층위는 서로를 향해 긴밀하게 기울어진 구조를 이루며 결국 어둠 속에서 함께 빛을 품는 존재들로 재정위 된다.


태초에/어둠 가르던 /신의 손처럼: 이 시어에서 나는 창세기의 태초의 빛을 떠올렸다. 또한 신이 손을 사용하여 어둠 속에서 빛을 꺼내는 것 같은 모습을 생각했다. 신의 절대적 힘은 어둠과 빛이 공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빛과 어둠은 분리된 현상이 아니라 상호 침투한 뒤섞임의 물질이라는 것이다. 어둠이 사라져야 빛이 아니라 어둠 안에 빛이 있고, 빛 사이에 어둠이 스며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빛은 인간에게 치욕적인 공간인 에덴동산에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인간이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경계의 불꽃, 바로 에덴을 감찰하는 ‘라하트 하헤렙’이다. 불이 두루 돌아다니는 모습을 이미지화 한 표현은 불꽃처럼 어둠의 공간, 에덴을 비추고 있다.


이제 거대한 우주의 빛은 어둠 속에서 칼의 불꽃으로 수렴했다. 또한 의미적으로 창조의 빛은 경계와 수호의 불로 옮겨졌다. 이 빛과 칼, 불이 최종적으로 집약된 것이 바로 가로등 아래 억새이다. 이들이 에덴을 수호하는 것처럼 억새의 불꽃은 밤 같은 일생을 보낸 어떤 사람의 은퇴한 삶, 산책의 길을 여러 갈래로 비춰준다. 불칼의 궤적처럼 보이며 ‘빛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로써 이 시어는 창조의 빛, 신의 손을 관조하는 이미지에서 땅을 수호하는 불꽃, 인간의 발을 보호하는 이미지로 확장된다.


아침을 파수하는/“진주보다 고운 이슬처럼,”: 나는 이 억새의 이미지에서 밤이 지나고 나면 맺힐 이슬을 떠올렸다. 마침 지난 70년대 한국 역사에서 투쟁의 상징으로 불렸던 ‘아침 이슬’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이 노래에서 이슬은 밤을 파수한 이들에게 내리는 은총과 회복의 상징이었다.


이슬은 밤을 버텨내고, 어둠의 위협을 ‘파수한’ 보상이다. 이 시어에서 이슬은 빛-불꽃의 강렬한 이미지를 중화하는 기제이다. 이처럼 영롱한 물방울은 어떤 숭고한 하늘의 위로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밤 같은 세계가 되어버린 에덴을 파수한 결과, 아침이 되어 ‘진주보다 고운 이슬’을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밤이 끝나야 이슬을 맞이한다는 도식을 비켜나, 밤 같은 세계 속에서도 이슬 같은 빛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진은 바로 그 점을 잘 보여준다고 해석한 것이다.


오늘/죽음 같은 세계에서/경야(經夜)하는 벗, 가로등/겨울 불꽃―: 이 이슬 같은 빛이 가로등이며, 억새에서 형상화된 겨울 불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나는 “죽음 같은 세계”를 선택했다. ‘경야(經夜)’는 죽음의 예식에서 함께 밤을 지새워주는 태도다. 밤을 함께 보내주는 것이다. 밤을 제거하지 않고서도 죽음 같은 계곡을 함께 지나가 주는 우리의 오랜 전통이다.


누군가의 슬픈 사건을 함께 수행해 주고, 밤에 둘러싸인 이를 돌보며, 잠에 저항하면서 깨어 있는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그는 ‘벗’이다. ‘도반’처럼 ‘죽음의 계곡’을 함께 걸어주는 친구다.


나에게 가로등은 마치 인간 같았다. 함돈균의 사물 철학을 빌리자면, ‘가로등’은 바로 신의 시선을 닮은 문명의 빛이다. 어둠 속에서 밤길을 걷는 이와 이어진 관계적 사물이다. 동시에 이 가로등은 겨울을 따뜻하게 다독이는 불꽃같기도 하다. 마침내 이 시어에서 창조의 빛은 가로등, 겨울불꽃으로 이어졌다. 그 불꽃 아래 억새도 빛난다.


결국, 이 시어의 네 층위는 창조–에덴–이슬–오늘의 가로등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지며 어둠 속에서 깨어 있는 존재들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창조의 빛은 에덴의 불칼로 변형되고, 아침 이슬의 은총을 거쳐 오늘의 가로등과 겨울 억새로 현현된다. 이 구조는 현실의 고독, 어둠과 빛의 공존, 그리고 존재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관계적 발광체를 드러낸다. 사진 하나에서 시작한 시어가 우주적 기원에서 오늘의 산책길까지 이어지는 길을 열어주고, 그 길 위에 선 작은 억새가 모든 빛들의 계보를 한 몸에 품은 존재로 드러난다.


의도

이 디카시는 단순히 사진과 시어의 조화를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나는 이 밤 같은 세계를 버텨내는 인간이 결국 관계적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누구나 홀로 있지만, 누구도 고립되지 않는다는 것.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어둠을 지나야 새벽이 오고 이슬이 맺힌다는 전통적인 이슬론을 넘어서고자 했다. 삶은 언제나 밤을 통과하는 일이지만, 인간은 그 밤 안에서 빛을 따라 걸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슬은 아침이어야만 빛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어둠 속에서 영롱하게 맺혀 있다. 다만 불꽃이 없어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이 모든 생각은 나의 검은 안식의 철학, 곧 “어둠–깊은 밤–깨어 있음–한 줄기 빛”의 구조를 아주 압축한 형태로 이 디카시에 구현한 것이다.


이 디카시에서 구조적으로 보면, 태초의 빛, 에덴의 불칼, 아침의 이슬, 오늘의 가로등, 그리고 겨울 불꽃(억새)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공간, 다른 질감을 지니지만 결국 하늘의 시선으로 보자면 하나의 시간, 영원 안에서 서로 관계하는 것들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존재들”의 조화이며, 이 관계는 ‘빛의 다양한 형태들’을 드러낸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흔들리면서도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는 버팀의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공생의 도반이다. 나는 이 관계적 발광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마지막 단락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실존의 중심부이다. “죽음 같은 세계”라는 문장은 오늘날 모두가 인정하는 절망의 세계를 수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경야하는 가로등”은 그 절망을 함께 견뎌주는 ‘살아 있는 빛’을 의미한다. 나는 이 이미지를 통해 “밤이 지나야 아침의 은총을 맞이한다”는 오래된 명제를 넘어, “밤의 한복판에서도 빛의 은총은 이미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정리

나의 디카시 〈억새 가로등〉은 ‘사진의 시각적 형상’과 ‘시어의 과도할 정도의 세밀함’으로 극대화한 결과다. 태초의 어둠–신의 손이 빚어낸 빛–인간이 축출된 에덴–그곳을 지키는 불꽃–투쟁의 밤–아침 이슬–고난의 밤–경야하는 벗–가로등, 이 일련의 이미지들과 불꽃이 하나의 고리처럼 이 디카시에 담겨 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이는 성서·자연·현대 문명·실존철학의 층위가 한 장의 사진 아래 모여 형성된 결과다.


특히 나는 나의 청춘과 함께 흘러온 ‘아침 이슬’을 새롭게 해석하고 싶었다. 밤을 버텨야만 오는 영롱한 밝음의 세계를 넘어, 이제는 ‘밤 안에서도 밝음을 볼 수 있는 지혜’가 내 몸 안에 스며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었다. 밤의 깊은 곳에서 빛나는 불꽃, 그 거룩한 화염은 나를 둘러싼 어둠과 ‘대응(對應)’한다.


따라서 이 디카시에서 사진은 그 자체로 강렬하지만, 나는 시어를 통해 그 강렬함을 나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마지막 행에서 대시(―)를 사용한 것도 이 디카시가 열린 종결로 남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가로등이 켜지고, 불꽃이 사그라들지 않고, 밤하늘의 빛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처럼, 나의 어둠에도 불꽃의 떨림과 밤의 빛이 미완성인 채로 계속 되돌아오고 있다.


이렇듯 〈억새 가로등〉은 나의 검은 안식 시학을 함의하는 작품이다. 정리하면, 억새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어둠을 가르던 신의 손길’이나 ‘에덴을 감찰하던 라하트 하헤렙’처럼 근원적이고 신성한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즉, 어둠이 지배하는 ‘죽음 같은 세계’에서 밤새 깨어 빛을 밝히는 ‘경야(經夜)’의 사명을 지닌 사물이다. 나아가 구원과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진 속 강한 대비는 현실의 고난과 어둠(“죽음 같은 세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빛(“겨울 불꽃”)을 밝히는 존재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결과가 되었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이 디카시는 위로와 깨달음의 메시지를 새롭게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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