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따라 시읽기-정호승 시인의 「서울의 예수」
정호승 시인의 「서울의 예수」를 다시 읽는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은 이후 어느 새 30년이 훌쩍 지났다.
여전히 책상에서 읽으면 낯설다.
이 시는 오히려 서울 한복판의 광장 벤치에서나,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앉아서 떠올릴 때 시의 현실이 실감난다.
세월이 지나도 이 시의 언어들은 어느 한 시대의 정황에만
묶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수록 심화하는 인간의 고통과 삭막해지는 문명의 풍경 속에서
오롯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래도록 이 시에 마음에 걸리곤했다.
시인이 빚어낸 언어와 이미지 속에서 질문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왜 예수는 서울에서 이토록 슬픈가?”
“정말 슬픔이 이 시의 주제일까?”라는 물음이었다.
슬픔의 예수, 낯선 현현
정호승의 시 속 예수는 성서가 전하는 갈릴리의 예수와는 사뭇 다른 자리에 서 있다. 예수에 게서 시적 전환이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다.
먼저, 그의 정체성의 변화다. 시 안에서 예수는 한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다. 또,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으며, 홀로 절망의 끝에서 걷고 있다. 그의 손에는 기적의 빵과 물고기 대신 술잔과 담배가 쥐어져 있다. 사람들을 춤추게 하는 구원의 기쁨은 사라졌다. 눈물과 가난, 절망이 그를 포위하고 있다.
시인은 이런 묘사로 예수가 더는 초월적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대신에 인간적 고통에 참여하는 존재로 재배치한다. 신성의 틀을 완전히 벗어버린 모습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이 시의 매력이다. 예수를 해체한 것이다. 이 해체는 예수의 신성을 약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약화가 오히려 고통 속 인간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는 성육신의 신성을 강화한다.
서울이라는 공간, 이미지의 교차
또한, 이 시의 무대가 ‘서울’이라는 것도 예수와 관련된 시적 전환을 시사한다. 서울은 예수의 본래 무대인 갈릴리와는 전혀 다른 대도시다. 그러니 서울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시인의 의도한 상징으로 기능한다. 특히 낚싯대, 모닥불, 구치소 담벼락, 아파트 숲, 소주잔, 빈대떡 등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빚어낸 구체적 사물 이미지들은 예수의 몸과는 이질적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일상의 사물들을 예수의 몸짓과 직접 연결한다. 이 도시의 사물들은 곧 도시의 암울한 현실을 함축한 메타포이다. 시인의 묘사로 나는 도시가 가진 물질성에 인간적 고통의 무게가 배인 채로 예수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떠올린다.
이런 점에서 「서울의 예수」는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의 이미지를 강조한 사물시(poetry of things)의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릴케가 사물시 「표범 Der Panther」에서 적극 활용했던 기법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물시는 사물의 내밀한 본질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려는 시적 의도를 반영한 기법이다. 정호승의 이 시 역시 도시의 사물을 매개로 예수의 슬픔을 고도로 형상화한다.
목마름의 은유, 반복과 리듬
동일어구의 반복이다. 시인은 이 시 3단락에서 “목이 마르다”라는 구절을 여러번 사용한다. 이 반복은 단순히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시적 운율을 이끄는 기능이 현저해 보인다. 마치 후렴구같다. 그리하여 이 시 전체는 한 편 기도문처럼 읽힌다.
그런 점에서 이 반복의 효과는 시학의 관점에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정서적 고조다. 즉, “목이 마르다”는 실제로 갈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겪는 결핍을 환유한다. 따라서 이 구절의 반복은 이 시를 접하는 독자 자신도 결핍된 존재라는 것을 일깨운다. 다른 하나는 서사를 지연시키는 것이다. 구절이 반복됨으로 시의 진행은 느려진다. 따라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 구절에 머물게 된다. 일종의 시의 여울목 같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 기능으로 독자는 자신도 목마르고, 그 목마름의 해결이 늦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詩 「서울의 예수」을 관통하는 정서의 알짬은 단순히 ‘슬픔’이 아니라, 인간이 겪는 존재의 갈증이라 할 수 있다.
언어의 역설, 역동하는 의미
이제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이렇게 탄식한다.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이것은 문장 자체로 충격적이다. 전통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존재와 삶이 해방된다는 주장에 대한 역설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지금 교리를 전복하는 과감한 시도를 감행한다. 시적 차원에서 본다해도 이런 묘사는 수위가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런 충격적 언어여야만 어떤 관습적인 신앙이 자신의 길을 성찰하고 돌이킬 수 있다는 시인의 자조적인 한숨이 드러난다는 것도 분명하다. 어쩌면 시인은 문학의 힘을 빌어 종교적 탈선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문학은 종종 언어의 전복을 통해 진실을 드러낸다. 에밀 시오랑이 말했듯, “(시의) 언어는 진실을 배반할 때 진실에 가장 가깝다.” 이 주장이 정호승의 언어에서 그대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이름이 오히려 불행으로 이어지는 역설은, 신앙에 내재된 가치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역설과 전복, 성찰-시가 살아있는 이유
이렇게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는 의도적인 시적 전환을 통해 독자가 종교의 위선을 냉철하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단지 사회비평시에 머무르지 않으며, 슬픔에만 천착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통해 특히 종교적 실존을 드러내고, 동시에 문학이 어떻게 그 절망 속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견인하는지를 역설한다. 이로써 시적 정의가 실현되는 역할도 잘 수행한다. 시의 언어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현실의 고통과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비로소 시답다. 그러므로 이 시는 예수의 모습, 교리의 전복 등을 시학적 장치를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독자를 철학의 자리로 이끈다. 절망과 희망은 한 시공간에 머문다는 것이다. 하여 나로 하여금 절망 속에서 소망이 움트는 틈을 발견하게 한다.
이렇게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는 의도적인 시적 전환을 통해 종교의 위선을 냉철하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단지 사회비평시가 아닌 것이다. 슬픔에만 천착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통해 특히 종교적 실존을 드러내며, 동시에 문학이 어떻게 그 절망 속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견인하는지를 역설한다. 이로써 시적 정의가 실현되는 역할도 잘 수행하는 것 같다. 시의 언어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현실의 고통과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시답다.
나는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이것이 바로 시가 살아 있는 이유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이 시는 인간의 눈물과 목마름을 가볍게 덮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견디며 언어로 형상화해준다.
그리하여 독자에게는 절망을 넘어설 끈질긴 힘을 연약한 언어로 다시 선사해 준다. 서울에 온 예수는 서울의 한복판을 걸었다. 그 길은 슬픔으로 가득하고, 절망으로 뒤덮였다. 그러므로 그의 길은 곧 우리의 길이기도 하다. 시는 이 길을 언어로 조명하며 밝혀준다. 그 순간, 이 길은 어둠에 번진 채 빛나는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