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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오이 Jul 23. 2022

모든 승부는 최소 삼세판

죽음 학자로 유명한 퀴블러 로스는 자신의 책 <죽음과 죽어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모두 불멸의 존재이기에 우리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72p)


담당 교수님은 내가 아주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암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방향이 삶이 아닌 죽음을 향해 있다 느끼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오진받은 사례는 뉴스에도 많이 나오니까요. 착오로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를 봤을 수도 있습니다. 이건 이전에 ‘마음에 차지 않아 다른 병원에 가보자’와는 느낌이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치과마다 충치가 1개였다가 9개였다가 하는 것처럼 진단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끝내 납득할 수 있는 충치 개수를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여기도 저기도 모두 9개라고 하면 9개인 거겠지요. 지금 현재 상황, 양성 1명 악성 1명으로 무승부입니다. 모든 승부는 최소 삼세판은 되어야 합니다.


일주일 뒤 수술 날짜를 정하기로 한 날 교수님에게 쭈뼛대며 물었습니다.

“혹시 암이 아닐 확률은... 없겠죠?”

“제가 봤을 때는 암이 맞아요.“

병원을 바꾸려고 마음먹고 왔는데 막상 교수님을 마주하니 말을 어찌 꺼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나는 담당 교수님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암이라는 결과를 내게 알릴 때는 진중했으며, 내가 눈물을 쏟을 때는 울만큼 다 울어내라며 얼마가 됐든 기다려줬습니다. 낯선 것들에 둘러싸인 수술실 한가운데에서 불규칙한 긴장을 다스리고 있을 때는 손을 잡아주었고요. 그랬는데, 내가 병원을 옮긴다고 하면 표정이 싹 바뀌면서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할 것 같았습니다. 이원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의사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교수님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서 암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래도 될까요?” 나는 교수님 표정을 살피며 말했습니다. 교수님은 지금까지처럼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당연하죠. 본인이 받아들이는 게 먼저예요.“

아마 그동안 숱한 환자들을 보며 그들이 언제쯤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선생님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요. 혹시나 하는 마음 있잖아요. 사람이니까. 나중에 후회를 안 남기고 싶어서,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게 환자 권리예요. 권리를 주저하지 마세요. 혹시 생각해 놓은 병원 있어요?”

나는 그제야 실실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내보였습니다. 유명하다는 병원의 교수 목록 중 마음 가는 곳으로 세 곳을 선정해 적은 쪽지였습니다. 집에서부터 손에 쥐고 갔지만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교수님도 따라 웃으며 쪽지를 받아보고는 한 곳을 짚었습니다. 나는 연신 꾸벅이며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근데 약속할게 있어요.” 소견서를 건네며 교수님이 말했습니다. “치료 잘 받고, 마음 굳게 먹고 이겨내기. 이렇게 두 가지만 약속합시다.” 그러면서 새끼손가락을 걸자며 내밀었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많은 의사를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환자를 이원보내며 손가락 약속을 하는 의사가 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진료실 문이 닫힐 때까지 연신 인사를 했는데 그 기분이 마치 정든 스승과의 이별처럼 서운했습니다. 잠시 이원이 망설여질만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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