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na Kim Sep 30. 2016

기대의 값

기대치 -  期 기약할 기  待 기다릴 대  値 값 치

그 날의 아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내가 태어나던 7월 5일의 여름날.

병원에서 날 처음 마주했을 아빠의 얼굴.

나를 처음 안았을 때의 아빠의 품의 온도. 

우는 나를 달래고자 어색하게 팔을 흔들었을 아빠의 노력.


아빠가 28살이던 1988년의 여름,

그로부터 정확히 28년이 흘렀다.




아빠의 큰 딸은 수다스러웠다. 


차에 오르면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과 싸운 일, 사고 싶은 장난감의 이름, 어디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등을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이것을 이야기하다가 저것으로 주제를 옮기는 것이 무척이나 쉬웠다. 눈물이 많지만 웃음도 많고, 예민하지만 대체로 유쾌한 딸. 어른의 삶이라던가, 미래라던가,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리기만 한 딸. 



아빠는 그런 큰 딸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봤다. 


혹여나 진득하게 하나를 지속하지 못하고 다른 여러 가지에 손을 대다가 이도 저도 아닌 무능한 어른으로 살아가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너무 감정적이기도 했다. 사람의 말 한마디에, 행동 하나에 상처를 받고 마음을 쓰는 것이,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너무 오래 아픔을 지니고 있을까 봐, 별 것도 아닌 것에 너무 오래 분노를 품고 있을까 봐 염려되었다.



아빠의 큰 딸은 굳이 뉴욕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했다.


물 좋고 산 좋은 밴쿠버, 가족들도 친구들도 가까이에 있는 이 곳에서 공부하면 좋으련만, 머나먼 뉴욕까지 가서 패션을 공부하겠단다. 다른 직업도, 다른 전문성도 많이 있는데 디자인을 선택한 딸. 확신이 있는 걸까? 몇 번이고 생각해본 것이 맞을까? 하지만 두 번 세 번, 백 번 천 번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는 그런 큰 딸의 미래가 불안했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 대학 졸업장 가지고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이나 할까 고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특별히 해줄 건 없고, 어서 번듯한 직장에 자리 하나 잡아서 인정받고 승진하고 돈이나 많이 벌면 좋겠다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딸에게 조금은 덜 미안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빠의 큰 딸은 아직 부족했다. 


가게를 열어야 하는데 영어가 짧은 자신을 대신해서 큰 딸이 몇 가지 일처리를 맡아주고 있다. 그런데 너무 어리다. 경험도 없다. 쉽게 흥분하는 데다 아주 꼼꼼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러다 가게 오픈일이 늦춰지거나 일에 차질이 생기면 큰 일이다. 뭐라고 잔소리를 해도 부족하기만 하다.



아빠는 그런 큰 딸의 오늘이 궁금하다.


요새 통 연락이 없다. 무엇을 하고 지낼까. 직장에서는 별일이 없는 건가. 만나는 사람이 생긴 것 같기도 한데 가족 중 누구도 정확히 말해주지는 않는다. 전화를 거는 것도 문자 하나를 보내는 것도 이제는 영 어색하고 뻘쭘할 뿐이다.




세명의 자식들 중 특히 큰 딸인 나에게 갖는 아빠의 기대치가 있다내가 인식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때부터, 아빠가 나에게 갖는 기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두 살 터울의 여동생과 열 살 터울의 남동생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언니와 누나로서의 책임감까지 보태졌다.


자매끼리 싸우는 건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집안에 작은 다툼의 소리만 날라치면 나는 불려 갔고 호통을 들었고 울면서 잘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동생은 늘 내 뒤에 조용히 서있었다. 내가 잘못을 시인하면 모두 끝나는 일들이라는 걸 아주 어릴 때 알게 된 것이었다.


아빠도 엄마도 좋은 학교 성적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진 않으셨다. 특별히 불량스럽게 논다거나 말없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이상행동을 한 적이 없었기에 학교에서 부모님을 데려오라고 해본 적 없이 평범한 학교생활을 보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해가 된 건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속시원히 내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도 없다. 아마 한 손안에 꼽는 정도, 식사를 하다가 나눈 몇 번의 대화 정도는 있겠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 반복적이진 않았다. 처음 이민을 왔을 때, "한국 남자 만나 결혼해야 된다, "라고 했던 아빠의 충고 하나 정도만이 내 뇌리에 남아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 아빠가 지금 것 홀로 가지고 있던 나를 향한 기대의 값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잘하면 잘해서 집중받고, 못하면 못해서 집중받는 게 사람이다. 잘하면 더 잘해야 하고, 못하면 하루빨리 잘해야만 한다. 쉽게 과거의 모습이나 아는 집 자식과 비교될 수 있다. 예전엔 잘했는데 요즘은 왜 그러니? 쟤네 집 아들은 이렇다는데 넌 왜 이러니? 식으로. 나와 아빠의 사이에는 그런 정해진 틀도, 비교의 대상도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서 어떤 모습을 원하는 것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기대의 값을 내가 안다고 해서 그런 인생을 살아드릴 수 있는 것일까,라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이런 직장에 들어가서 이만큼의 연봉을 받고 이런 사람을 만나 이런 자식들을 낳고 살아주라,라고 하나하나 나열해주신다 해도 나는 아마 당황스러움과 불편함만을 가지고 저 멀리 도망할 것이 분명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기대의 값.

연인이 연인에게 갖는 기대의 값.

친구가 친구에게 갖는 기대의 값.


세상의 수많은 관계 속 각자의 기대치를 말로 전달하는 것은 생각보다 위험하고 잔인할지 모른다.




내가 아빠의 큰 딸로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가 있는 이 곳에서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해내는 것이 아닐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는 내가 가장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고, 어떤 변화가 필요한 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최선을 다해 더 나은 변화를 추구하는 것. 나는 그저 이들을 선택한다. 


지금의 내 나이에 나를 첫 딸로 맞이한 아빠는 어쩌면 나의 인생을 통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했을 수 있다. 자신에게 부족한 모습들이 내게는 없었으면 하고 바라었을 수도 있고, 자신이 걸어온 길의 정확히 반대로 내가 걸어가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인생이 아빠의 인생의 두 번째 버전은 아니지 않은가. 

내 인생은 내 인생의 첫 번째 버전이자 마지막 버전이다. 

그리고 나는 이 인생을 나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이것이 아빠가 내게 가지고 있는 기대의 값을 치르면서 살아가는 나의 유일한 방법이다.




Source:

Image by Charlie Han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