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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a Kim Dec 30. 2016

2016이 내게 준 6가지 교훈

29년을 살아온 나에게 보내는 응원

내게 2016년은 나에 대해 더 깊이 배우는 중요한 한 해였다. 회사에서는 인사과도 해결해주지 못한 갈등을 이겨냈고, 4번의 여행을 다녀왔으며, 그동안의 수많은 관계들을 재정립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을 문자로 남기는 일. 그리고,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타인이 문자로 남긴 당신의 생각을 알아가는 것을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면서 이런 질문이 생겼다.


나는 왜 이제야 진짜 나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게 되는 것일까?

과거에도 나는 글을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편지와 일기에 공을 들이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사람을 관찰하고 그들에 대해 알아가는 것을 신비롭다 믿었다. 여행은 인생에 꼭 필요한 요소, 갈등은 이겨내야 하는 싸움과도 같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2016년이 되어서야 정말 나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서른을 앞두고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엔 마흔이 새로운 서른이라 하지만, 직접 먹어보지 않으면 절대 맛을 모를 음식과도 같이, 나에게 서른이 될 내년은 큰 의미를 갖는다.


중요한 일을 내일로 앞둔 사람에게는 오늘의 의미가 달라진다. 크게 의식하고 있진 않았지만, 일상에 치여 내가 몇 살 인지도 잊고 지냈지만, 나의 마음은 사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양에 대해 최대한 많이 배우고자 했던 모양이다.




1.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생에서의 큰 실망은 큰 기대에서 온다. 인간관계에서 마음이 다치는 이유도 상대에게 맞지 않는 기준과 기대를 갖고 있던 나 자신에게 있을 때가 많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집중할 수 없는 나를 발견했던 이번 여름. 나는 모든 것을 잘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친구사이라던가 연인 사이에서도 연속적으로 상처받았던 이번 가을. 모든 사람과 이상적인 관계를 만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것이다. 어떠한 일이든 작은 행동으로 끝까지 지속할 때 '그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글을 쓸 때에도 내 마음이 향하는 곳, 내 눈빛이 쏟아지는 곳, 내 관심이 몰리는 곳으로 따라가 보면 글을 쓸 주제가 날 기다리고 있다. 심장을 뛰게 하는 주제가 많다면 차근히 하나씩 써보면 된다. 써보지 않고는 모른다. 무엇이 정말 나의 주제인지.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단 하나를 찾기 위해서는 수만 가지를 아주 작은 행동일지라도 직접 해봐야만 한다. 아무도 나를 위해 한 가지를 골라줄 수 없다.


또한,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없다. 물리적, 감정적, 정신적 사실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기준을 갖다 대면서, 기대치를 설정해놓고, 우정과 사랑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상처받는 이유, 쌍방통행이 아닌 일방통행이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돌아서라. 포기는 김치 셀 때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자주 사용해야 할 단어이다. 진짜 포기해야 할 관계를 포기하면, 진짜 투자해야 할 관계가 물 위로 떠오른다. 더욱 선명하고 더욱 명확하게.



2. 남들과 다른 것 이전에 '나만의 것'을 찾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특히 지인들이, 여러 분야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동안, 나의 마음도 덩달아 급해진다. 그러다 보면 내가 정말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시간에, 시간에 쫓겨, 시선에 쫓겨 급한 선택을 하고 만다. 며칠, 몇 주, 몇 달을 소비하고 나서 뒤늦게 발견하는 사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을 탐내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시간을 잃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으로.


테크놀로지의 영향으로 이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해도, 과거에는 상상도 못 한 직업들이 매일 생겨난다 해도, '남들과 얼마나 다르냐' 보다 '나만의 것이 맞느냐'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 내가 속한 분야에서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수천, 아니 수만 명이 존재한다. 국경을 넘어서면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그 일이 무엇이든,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그래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남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이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내가 먹은 것이기에 나의 식사이고, 같은 옷이어도 내가 입은 것이기에 나의 취향이 된다. 동사보다 '주어'에 집중하는 것. 내가 하는 일에 ''라는 사람이, '나의 목소리'가 스며들면, 그렇게 나만의 것이 남들과 다른 것이 될 것이니까.



3. 행복은 저 멀리가 아닌, 꽤 가까이에 있다.


똥통에 빠져있다 믿으면, 똥이 온 시야를 가려 행복을 찾을 수 없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 좋은 회사에서 팀 잘못 만나서 푸대접을 받고, 인사과에서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지만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메일 수신자란에 자기 이름을 다른 여성 직원 뒤에 오게 했다고 구박하는 남성우월주의자인 직장동료에게 부모님한테서도 듣지 않는 잔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곳이 똥통이구나.


행복하고 싶었다. 출근길에 나도 모르게 신명하는 콧소리를 흥얼거리고 싶었다. 퇴근길이 아쉬워 자꾸만 내 책상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출근길이 지옥길, 퇴근길이 천당 길이었다.


계획 없이 일을 저지르고 마는 20대 초반의 나의 모습이 그리웠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흘렀고, 나는 매달 집세를 내고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한 사람의 어른이 되어있었다. 물론, 일을 당장 그만둔다고 해도 당장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을 돕는다거나, 새로운 포트폴리오를 만든다거나 하는 일들. 결국 어떤 형태로든 일은 계속해나가야 하는 인생이었다.


그렇다면, 이 안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편안한 직장생활 덕분에 내게는 시간이 많았다. 이 곳을 벗어나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 대신, 내가 있는 이 곳에서 행복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자,라고 결심했고, 그 결심으로부터 나는 '글쓰기'를 찾아냈다.


일상의 소소한 갈등들은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 내게 달린 건 선택이다. 갈등 앞에 서서 내가 내리는 결정, 그리고 내가 하는 나의 생각들. 무슨 결정과 어떤 생각을 선택할 것인가는 모두에게, 각자에게 달려있다. 행복은 절대 태평양 건너, 대서양 건너, 인도양 건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저 멀리, 블랙홀 안에 숨어있는 것도 아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오랜 말처럼,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행복은 또 다른 행복을 낳는다. 지금 나만의 작은 행복을 찾지 못하면, 다른 곳에 숨겨진 또 다른, 조금 더 크고 더 깊은 행복을 가질 수 없다.



4.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어릴 적, 오일장이 열리는 시내에 나가려면 집에서 20분 정도 차를 타고 나갔어야 했다. 시장에는 어떤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바퀴가 달린 나무판에 몸을 뉘운채, 큰 노랫소리와 함께 시장을 배회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나는 장을 보러 나온 엄마의 손을 붙잡고, 그 아저씨를 지나치면서 늘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아저씨의 다친 하체를 감싼 고무를 바라보았다. 말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아림, 왜인지는 모르겠는 진동이 내 안에 머물렀었다.


나는 대부분의 동네 주민들이 60세가 넘은 노인들이었던 작은 시골마을에 살고 있었다. 엄마는 그 어르신들의 아픈 곳을 들여다보고 공감해주고 약을 처방해주는 보건진료소 소장이셨다. 나는 동네 주민들에게 천사와도 같은 그 엄마를 닮은 보건소 집 큰 딸이었다.


보건진료소는 아침 9시에 문을 열었다. 진료소로 사용되는 거실과 그 바로 옆의 작은 방을 뺀 나머지 공간이 우리의 집이었다. 급한 통증에 해가 뜨기도 전부터 진료소를 찾아온 환자분들을 엄마는 늘 짜증 없이 맞이했다. 맘씨 좋은 엄마 덕분에 계절마다 우리 집 현관문 앞에는 과일과 채소, 쌀과 과자들이 쌓여있었다.


내게 있어, 좋은 사람이라는 건 머묾이고 따뜻함이었다. 마음이 머무는 것, 마음을 물들이는 따뜻함.


시간은 흘렀고, 나는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 와있다. 가족과도 같았던 시골 사람들의 눈빛을 들여다보던, 넓은 논을 맑은 눈으로 응시하던 나는 없다. 대신, 바쁜 도로를 더 바쁘게 운전하면서 새치기하는 사람들의 뒤통수에 경적을 울리고, 엽서에서나 볼 수 있던 눈 내린 산을 아무런 감동 없이 슥, 흘겨보는 내가 있다.


연인에게 나의 고집을 강요하고, 나의 요구를 재확인받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친구들에게서 내가 주었던 양만큼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마음속으로 그들의 얼굴 위에 큰 엑스자를 그린다. 지나가다 돈을 구걸하는 걸인을 봐도, 추위에 떨고 있는 그들의 반려견을 봐도, 그곳에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


서서히 답답함이 찾아왔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점점 멀어지면서 생기는 감정의 골. 그 골이 깊어지면서 답답함이 그 안을 채워갔다. 그래서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나라는 사람의 현재의 모습을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좋은 면을 가진 사람이지,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에게 좋은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 있다. 인간의 몸을 한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두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인정하고 나니, 이해되기 시작했다. 세상에 나를 끼워 맞춰도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는 나의 좋은 면이 자주 발견되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나의 안보가 우선순위가 되면서 이타적이기보다 이기적인 생활이 이어졌고, 좋은 면보다는 생산적인 면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이 것을 알게 된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먼저 이해하기도 힘들고, 먼저 나서서 그들을 감싸주지도 못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의 좋은 면을 믿어주는 믿음이 생긴 것, 이것 하나다. 2017년에는 그 믿음을 가지고 시작한다. 나의 좋은 면들이 더 많이 발견될 한 해가 될 것이다.



5.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나에게도 '분명' 있다.


나의 예전 글 <아끼면 똥 되는 것 4가지>에서 칭찬할 줄 모른다고 한번 공격했던 아빠. 어느새 나에게서도 그런 아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재즈 공연 시리즈를 기획하고 시작하게 된 동생의 첫 공연이 지난달에 있었다. 조금 일찍 공연장에 도착한 나. 자랑스럽다, 기대된다, 라는 말 대신, 의자는 왜 이렇게 놓아져 있느냐, 누가 정돈했느냐, 라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핑계를 대자면 한번 하는 일은 좀 제대로 해야 하고, 앉아서 공연을 관람할 사람들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진행해야 한다는 나의 야무짐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처음 진행해보는 동생에게 나의 모습은 그냥 '아빠의 모습'이었다.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그 아비의 그 딸내미. 혀끝을 차도 차도 부족한 형편없는 언니.


공연이 끝난 다음 날, 나는 동생에게 고백했다. 말해놓고 보니 나도 내가 왜 그랬나, 싶었다고. 그리고 동생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아빠의 모습을 나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알코올 중독자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이 각자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페이스북 포스트를 보면서 공연장에서의 내 언어들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한 나의 선택. 그 선택에 달린 나의 인생과 나의 미래.


주어진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내가 쥔 것은 바꿀 수 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 사랑을 주는 사람, 기다려주고 소중히 여겨주고 용서해주는 사람. 받은 적이 없어서 줄 수도 없다는 거지 같은 변명은 때려치우자.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더 주기로 했다는, 세상 논리로는 성립이 안 되는 좀 더 쿨한 인생을 선택하자.


좀 성립이 안 되는 논리면 어떤가.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그렇게 해서 더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데. 말릴 사람 하나도 없다.



6. 매일이 또 다른 시작이자 과정이다. (연애도 과정인 것처럼)


이전에도 한번 고백했지만, 나는 지속을 오해하며 살아왔다. 특히 2016년, 무언가를 작게나마 계속해보겠다는 결정을 내린 올해, 나는 이 오해를 깨닫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침 8시에 시작한 일의 결과를 오후 5시에 보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욕심이었는지, 초를 다투며 나 자신을 맹비난하고 지적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지. 나는 깊이 반성했다.


이제와 보면, 나에게는 시작이 가장 쉬웠다. 그에 반해서, 끝은 늘 어려웠다. 그래서 시작을 해놓고, 끝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나만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았다.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속상한, 다섯 손가락 중 가장 아픈 손가락과도 같았다.


시작은 한 번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인생을 크게 보면 여러 번의 시작이 있어야만 하나의 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여러 번의 시작과 하나의 끝 사이에, 길고 긴 '과정'이 있다.


변함없는 사실은, 매일이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이다. '어제 시작했기 때문에 오늘은 끝만 기다리면 돼, ' 가 아니다. 어제 시작했기 때문에 오늘도 시작해야 한다.


어제 글을 쓰기로 작정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오늘도 글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 어제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운동과 식단 조절을 시작했다면, 오늘 아침에도 운동과 식단 조절을 시작해야 한다. 오늘내일 모래, 매일 시작하는 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멀지 않은 미래에 하나의 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시작'을 반복하는 '과정'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다.


'과정'을 즐길 수 없다면 끝을 만날 수 없다. 매일 시작하지 않는다면 끝은 어느 곳에도 없다. 타인의 판단이 두렵고, 일어나지도 않을 실패가 염려된다면 한걸음 물러서서 다시 한번 점검해봐야 한다. '끝'을 원하는 마음은 타인의 판단과 미래의 염려를 이길 만큼 강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작할 수 있다. 쉬웠다면 모두가 했을 시작, 모두가 맛보았을 끝이지 않은가.


지금보다 나은 하루, 지금의 직업보다 더 사랑할 직업, 지금의 나보다 더 행복한 나. 이것들을 원하는 당신의 마음을 강력하게 만들어라. 그 마음이 당신을 매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니까.




2017년을 앞둔 지금, 나는 다시 한번 인생의 성장통을 겪고 있다. 2016년 동안 나 자신에 대해 배운 만큼 앞으로 알아야 할 것이 더 많다. 까도 까도 속을 모르겠는 양파와도 같이. 때때론 나 자신이 이름도 모르는 타인처럼 느껴지고, 내가 두발로 서있는 이 땅이 난생처음 와보는 타지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올 한 해 살아온 것처럼, 내년 한 해도 살아갈 것이다. 타인이면 어떻고, 또 타지이면 어떠랴. 살아있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잘하는 사람.

나만의 것을 찾은 사람.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

내가 가진 좋은 면을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는 사람.

싫어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더 좋은 모습으로 바꾸어 내 안에 간직하는 사람.

매일 새로운 시작을 하는 사람으로 2017년을 살아간다면 충분하다.


내년의 끝에 서 있을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겪고, 배웠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나누어주고, 더 많은 공간에 마음을 머물게 했을 거라고. 이번 한 해 얻어낸 여섯 가지의 교훈에 또 새로운 배움들을 더했을 거라고.


마흔을 앞두었을 때, 쉰이 낼모레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나는 내가 가장 편안해하는 의자에 앉아,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글을 쓰고 있었으면 한다.

아직도 나 자신에 대해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이 남았다면서,

다가올 새로운 한 해가 기대되어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설렜다면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또 다른 한편의 글을 남기었으면 한다.




P.S.

새해를 맞아 늘 읽을 거리가 부족해 지겹도록 인터넷을 뒤지는 분들을 위한 뉴스레터를 시작하려 합니다. 아무래도 저와 저의 주변인들의 관심사이자, 짧은 브런치에서의 경험을 통해 알게된 우리 세대의 관심사인, 1) 삶, 2) (연애와 인간관계를 아우르는) 사랑, 3) 일에 대한 글들을 골라서 소개하는 뉴스레터가 될 것 같아요.


일주일에 한번, 이메일로 도착할 개인 맞춤(!) 리딩 리스트를 원하시는 분들은 여기를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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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저의 개인적 취향이 묻어날 예정이나, 원하시는 글들만 쏙쏙 골라 읽으셔도 되고, 또 혹여나 추천하시는 글이나 꼭 얘기해야만 하는 의견이 있으시다면 소통도 가능하니 관심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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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image by Nick Scheerb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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