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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ug 21. 2019

습작

여든네번째

아무 일 없는 어느 일요일 아침 

난 네가 휴대폰을 만지작대는 소리에 눈을 뜨겠지 

눈 비비며 일어나 걸어간 부엌에서 

미지근한 물 한 컵 떠와 나눠 마시고 

그대로 다시 누워 엉킨 채 

스르르 서너 시간을 더 잠들었다 늦은 점심에 깰 거야 

난 몰래 일어나 후라이팬을 데워놓고 

유통기한이 하루 남은 식빵의 마지막 두 개를 꺼내 넣는데 

넌 올리브기름 두르는 냄새에 불현듯 일어나 

화장실에서 눈곱을 떼고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나오면 토마토 들어간 오믈렛, 토스트, 뜨거운 커피 

멀리서 찾아오는 옆집 티비 소리와 함께 먹고 마시면 

십 분도 안 돼서 누가 먼저 화장실에 갈지 다투게 될 거야 

오후 두 시 반 쯤 돼선 침대에 누워 유튜브나 같이 보다가 

오늘은 뭘 하지, 하는 질문에 말없이 껴안아 뒹굴고 

자연스레 아무데도 가지 않기로 결론 내리겠지 

넌 책장에서 어느 외국 작가가 쓴 소설을 꺼내와 읽고 

난 곁에 누워 플레이리스트의 세 번째 노래부터 듣기 시작할 텐데 

굳이 손을 길게 뻗어서 내 오른쪽 이어폰을 빼가는 이유는 

오늘도 같은 노래를 듣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일 거야 

그렇게 눈 감고 밍기적거리다 이마에 감촉이 앉으면 

내가 커튼으로 햇빛을 꺾을 테니 우리는 맹인처럼 뒤섞이자 

어느새 습기 가득해진 방 창문을 열어젖히면 

멀리 산마루 미끄럼틀에서 내려갈 준비를 하는 붉은색 노란색 

시계가 자주색과 남색이 될 때쯤에는 피자가 도착할거고 

즐겨보는 미드 한 편을 틀어놓고 허기를 채우다보면 

늘 그랬듯 큼지막한 조각 두세 조각이 남겠지만 

지퍼백에 넣어 얼려두면 언제든 데워먹을 수 있겠지 

부른 배를 붙잡고 엉금엉금 침대로 기어가면 

먹고 나서 바로 드러눕는다고 또 한 소리 들을 거고 

소화나 시킬 겸 서로 가장 펑퍼짐한 옷 차려입은 뒤 

하루의 늘그막 돼서야 동네 마실을 오다니겠네 

그럼 적당히 무덥고 적당히 무료해질 때 쯤 해서 

마침 눈길 닿은 길가 코인노래방에 들어갈게 

난 부끄러워서 너한테 다시 선곡을 맡길 거고 

네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가장 마지막에 부를 거야 

나와 보면 가게 불빛 하나 둘 꺼져가는 동네 

아직도 분주한 슈퍼마켓에서 내일 먹을 식빵을 사서 돌아가면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창밖 소리가 주룩주룩 

내다보니 우리 지나온 길 수채화가 돼있네 

안도의 한숨과 함께 편한 옷보다 더 편한 모습이 된 다음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양치를 하겠지 

난 얼굴 뾰루지에 투덜거리고 있는 널 뒤로 하고 

전구색 전등 하나 남겨놓고 집안의 불을 모두 끈 뒤 

적당한 영화 한 편 찾기 위해 가나에서 파하까지 뒤져보다가 

네가 나오면 담요 한 채를 함께 두르고 앉을 거야 

구태여 십 수 년 지난 옛날 영화를 고르는 것은 

언제 누가 잠들어도 상관없다는 뜻 

자정 넘게까지 뻗어 나오는 불빛을 감상하다보면 

반드시 누군가는 어깨를 빌려주도록 돼 있어 

그럼 아무도 모르게 입을 맞추고 

또 다시 약속처럼 하루와 일주일을 떠나보내고 


<뻔한 일요일>, 2018. 8



<바다를 삼킨 고래>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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