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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Nov 01. 2019

습작

백스물세번째

 늦가을 바다가 하늘색으로 빛났다. 선착장에는 배가 없었다. 나는 해안가 도로를 따라 쭉 걸었다. 이따금 먼동에서 갈매기 우는 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직 겨울이라 할 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다만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 찰뿐이다.


 춥진 않았다. 그래도 습관처럼 겉옷 앞섶을 감쌌다. 두꺼운 감색 코트를 꺼내 입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새벽녘 서울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호들갑일 거란 생각이었는데. 엄마 말마따나 감기 걸리는 것 보단 어깨가 무거운 게 나았다. 옷깃에 코를 파묻자 오래된 옷장 냄새가 물씬 났다.     


 혼자 여행을 떠나본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들 간다는 내일로 여행도 한 번 못하고, 벌써부터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보람이 없었다. 승진을 못하는 것보다 승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내가 더 외로웠다.


 “어디라도 좀 떠나보지 그러니” 엄마의 말버릇이었다. 하기야 퇴근하기 무섭게 집에 와서는, 방에서 고양이 동영상이나 쳐다보고 있는 딸이 달갑진 않았을 것이다. 


 “응, 조만간” 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나는 홀로 떠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엄마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떠날 것 같지 않으니까.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으니까. 사람은 정말 떠날 것 같은 사람에게는 떠나라고 하지 않는다. 


 정말 그랬다. 나는 네가 떠나가지 않을 줄로 알았다. 정말이지 ‘떠나라’고 말하면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일을 관두고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그러면서도 네게 부단히 신경 쓰겠다고 했던 약속을 늦게나마 지키려 들 줄 알았다. 


 입 밖에 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지나간 시간도 돌아오지 않는다. 떠나간 사람에겐 어떤 표현도 가닿지 않는다. 사흘 전 통화버튼을 누르던 용기는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떠나야 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가버려야 했다. 그럴 때가 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사람조차 떠나게 되는 때가 말이다. 태어나 담배라곤 입에 물어본 적도 없다던 너도, ‘네가 담배 말린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하고 말했던 것처럼.


 주말마다 만나던 우리는 기회가 될 때마다 싸웠다. 또 싸우는 만큼 몸을 섞었다. 끝나고 나면 꼭 담배를 피웠다. 그동안 화장실에선 샤워하는 소리, 가느다란 물줄기가 네 몸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가 났고, 난 그 위로 연기를 섞어 포갰다. 그 때의 기분이 너와의 연결을 증명해준다고 믿었다.


 그래. 넌 그때 바다를 보러가자고 했다. 겨울이 되기 전에 한 번쯤 가서, 방파제가 떠나가도록 소리나 한 번 질러보자고 했다. 그러니 나는 열심히 일하고, 넌 공부해서, 사람 없는 해변에 나란히 선채 바람을 마주치자고 말했다. 언젠가 그렇게 되리라 약속했지만, 꼭 같이 할 거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한동안 내 적이었던 네가 떠났다. 나는 무적으로 떠나와 동해바다 앞에 섰다. 가끔씩 나는 네가 잠깐의 휴가를 낸 것 아닐까하고 착각해봤다. 당분간 상처받은 나로부터 떠나 쉴 수 있게. 긴 휴가를 보낸 뒤 문득 돌아와 날 안아주리라는 상상도 했다. 그래서 이맘때 되면 모아둔 연차를 쓸 줄 알았는데. 난 더 이상 오래된 여자친구도, 회사원도 아니었다. 


 별 생각 없이 꺼내본 휴대폰에는 부재중전화가 두 통이었다. 잠시나마 네 번호를 기대하는 내가 싫었다. 나는 엄마에게 ‘답답해서 잠깐 동해로 왔어요’ 라는 메시지를, 몇 년 간 함께 출퇴근 했던 동료에게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라는 메시지를 각각 남겼다. 


 가까운 바다 위로 이름 모를 새 몇 마리가 무리지어 날아올랐다. 퇴직금이 얼마나 나올지는 걱정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갈 곳도 없이 살찌울 나와 내 통장잔고가 더 걱정이었다. 내가 갖고 싶은 건 하나도 세상에 없었다. 밀려온 네 마음이 어느 날 빠지고 나니.     



<이별휴가>, 2019. 11





<작은 무리 해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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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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