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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Sep 17. 2020

습작

백일흔일곱번째


 온통 캄캄한 길을 가로 질러 걸었다. 오른손에 램프가 들려있었다. 몸에는 파란색 우비를 걸치고 있었는데, 언젠가 비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위에는 이따금 푸른 가지가 엉켜 나왔다. 주먹만 한 토마토 몇 개가 가지들 사이에 주렁주렁 매달려있었지만, 내 힘으론 도저히 따먹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나는 하루 온종일 걷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그 세상에는 낮밤이 없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희미한 빛이 내 주변을 싸고돌았으나 두세 발자국 앞에 있는 것조차 분간이 안 됐다. 지치지도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언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걸어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기야 떠올려봤댔자 지금 모습 그대로 걷고 있는 것밖엔 없다. 기억은 순전히 필요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다. 떠올리고 싶은 과거나, 그렇게 생각해두고픈 추억이 있을 때에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돌아가고픈 곳도 나아가고픈 곳도 내겐 없었다.


 똑같은 하루가 영원히 계속된다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시간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그 땐 시간을 구분하는 일 자체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똑같이 영원한 시간은 멈춰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멈춰있는 시간은 굳이 시간이라 부르지 않아도 된다. 사람은 변해가는 것들로만 시간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상태로, 목적지도 없이 줄곧 걷기 바빴다.  따라서 내가 그 세계에서 토끼를 만난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이야기해봤자 그다지 믿을만한 얘기는 아니다. 


 아무튼 간에 나는 불쑥 튀어나온 토끼를 휘둥그레 쳐다봤다. 흰 색 토끼였다. 그렇게 눈부실 만큼 하얀 토끼가 아니었다면, 나는 무언가 튀어나온 줄도 모르고 계속 걸었을 것이다.


 “넌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니?” 토끼가 내게 물었다. “뭔가 슬픈 일이 있었니?”


 “아니” 내가 말했다. 나는 심지어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딱히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래서 답답하니?”


 “잘 모르겠어.”


 “어디로 걸어가고 있어?”


 “모르겠어.”


 “걷는 게 힘들진 않아?”


 “모르겠어.”


 “그럼 알고 있는 걸 말해봐.”


 “그것도 모르겠어. 내가 뭘 알고 있지?”


 “너는 토끼보다 멍청하구나?” 토끼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 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아무 생각도 들지가 않아. 내가 왜 살아있는 지조차 알 수 없어. 나한테는 아무도 없거든.”


 “그건 누구라도 그래. 알고 보면 누구나 혼자 걸어가고 있지.”


 “그렇니?”


 “응” 토끼가 말했다. 신기하리만치 아무 억양도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뭔가 바뀌길 원하는 걸까?” 나는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있고 싶은 걸까?”


 “잠깐. 고민하지 마. 고민하면 안 돼” 토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왜?”


 “‘왜?’라고도 묻지 마. 여기선 안 돼. 여기는 고민 같은 게 싫은 사람들만 있거든. 더 이상 생각하지도 마. 슬퍼해서도 안 돼.”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야, 그건” 내가 대꾸했다. 


 “오, 제발. ‘내 맘’이라는 단어는 여기 없어. 더 고민하지 마. 고민하면 여기 있을 수 없어”


 “왜?” 머잖아 나는 견딜 수 없어져서, 재차 물었다. “왜 고민하면 여기 있을 수 없는데? 나는 왜 여기 있는 건데?”


 “네가 선택했잖아.”


 “선택? 무슨 선택?”


 “더는 선택하기 싫다는 선택을 했지. 아!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없는데. 더 이상 묻지 마. 대답해줄 수 없어.” 토끼는 난처해 죽겠다는 듯이, 삐질삐질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나는 물을 거야. 나는 궁금해. 나는 알고 싶어.” 내가 말했다.


 “안 돼. 여기서는 못 해” 


 “왜 못 하는데?”


 “‘왜’라고 생각해서도 안 돼.”


 “아니” 내가 말했다. “그건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이야. 그리고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왜’라고 물을 수도 있고, 생각을 할 수도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토끼가 돌연 느슨해진 투로 물었다. 


 “응” 내가 대답했다.


 “그럼, 너는 여기 있을 수 없어.”


 “뭐라고?”


 “거기선 여기랑 다르게 모든 게 바뀌어. 아무 것도 ‘그대로’ 있지 않거든. 시간이 흐르면, 너도 따라서 걸어야해. 그럼 안녕.” 토끼는 마지막 인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사라졌다.     


-     


 “……아!” 사방이 밝아왔다. 흐릿한 형체가 날 보자마자 알은 체를 해왔다. “……응? 선희야, 이제 정신이 드니? 엄마 말이 들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저릿저릿했다. 오른쪽 손목에 굵은 링거바늘이 꽂혀 있었고, 왼쪽 손목에는 빨갛게 물든 붕대와 거즈―그리고 지혈대―가 꽉 하고 묶여있었다. 떨어지거나 흔들리지 않게끔 반창고를 몇 번이나 붙인 모양이었다. 


 차츰 정신이 되돌아왔다. 나는 파란색 담요를 덮고 있었다. 등줄기에 땀이 흥건했다. 응급실은 몹시 더웠다. 이상한 약품 냄새도 풍겼다.


 엄마는 내 목덜미를 부둥켜안은 채 엉엉 울기만 했고, 아빠는 병실 바닥에 주저앉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한 시름 놓았다는 듯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나는 비로소 내가 선택했음을 깨달았다.          


<한여름 밤의 꿈>, 2020. 9




<아직 동트기 전 새벽>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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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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