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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Nov 23. 2020

습작

백여든세번째

11일.  머리맡에 작은 어항을 사다두었다 깨끗한 물을 한 대접 쏟아 넣고 어떤 물고기를 키우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하루가 다 갔다 내일은 버스를 타고 대형마트에 가보아야겠다     


15일. 열대어는 사흘이 채 안 돼 시름시름 앓는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어항의 물을 갈아다 주었지만 좀체 움직일 낌새가 없었다 너무 깨끗한 물에 선 물고기가 살 수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맑은 물을 넣어준 기억이 없다 나는 단지 함께할 친구가 없어서일지도 몰라 하고 생각했다     


20일. 두 마리의 열대어가 함께 앓았다 힘든 기색이 역력한데도 아무 말 없이 침묵하고만 있다 나만큼이나 그들에게도 책임이 없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동전 하나를 물속에 빠트려봤다 소원이 있다면 내일 아침 그 동전이 사라져 있는 걸테다     


23일. 더 큰 어항을 가져다 놓기엔 내가 사는 방이 너무도 좁다 우리들 세 마리의 공통점이라곤 기껏해야 그 정도였다 이토록 좁은 곳에 산다는 것 벌레처럼 웅크린 채 비척거리는 것     


27일. 나는 어린왕자 한 마디 말없는 장미에게 꽃을 따다주리 내 곁의 널 위해 무엇이든 가져다줄게 하늘의 별 헤는 나의 목숨 또 다른 세계의 너라 할지라도      


29일. 언젠가 그녀와 쓰려고 했던 입욕제를 어항에 넣었다 초록색 연두색 분홍색 연보라색이 더 아름다운 세상에서 행복하리라는 건 누구에게나 상식이니까 이제 보니 입욕제에도 엄연한 유통기한이 있다 주먹만 한 상자 윗면 인쇄된 날짜가 삼 년은 지났다 어항 속은 그새 탁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30일.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데 서툴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훨씬 서툴다 무언가 떠나고 나면 꼭 열흘은 머리가 아팠다 슬픈 마음이 그쯤이면 다 증발해버린다는 듯이 어차피 비슷한 하루 똑같은 비극들이 잇달아 오리라는 듯이     


1일. 삶이란 결국 혼자 떠나와 홀로 되돌아 걷는 것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머리맡에 아무도 두지 않겠노라고 두 번 다신 새로운 어항 새로운 열대어 새로운 누구의 색 들일 일 없을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비망록>

2020. 11     



<열대어>


-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은정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그림이 걸린 방에는 방향제가 필요없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작업도 후원하고, 당신만의 공간에 멋진 그림도 한 점 걸어두세요.  


아래 링크에서 다음 작업을 미리 후원해주시면, 이 작업을 더 오랫동안 지속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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