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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an 09. 2019

습작

여섯 번째

새벽까지 게임을 하다 보면 눈이 피곤한 법이다. 나는 그날 새벽까지 집 근처에 있는 PC방에 있었다. 집에 있는 컴퓨터가 고장 난 탓이었다. 그래서 평일 오전이 되자마자 컴퓨터를 맡길 요량이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PC방 공기에는 여전히 담배와 라벤더향 방향제 냄새가 섞여있었고, 야간 아르바이트는 전에 봤던 젊은 여학생에서 넙데데한 인상의 아저씨로 바뀌어있었다. 


카운터에 구비된 헤드셋은 비교적 신형으로 교체된 모양이었다. 다만 두 시간 이상 쓰다 보면 귓불 주변이 따가워지는 건 내나 똑같아서, 나는 헤드셋을 벗은 뒤 의자를 뒤로 젖히곤 쉬고 있었다. 그러자 모니터 너머 맞은편 자리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전까지 듣지 못했는지 신기할 정도로 선명한 대화 소리였다.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두 명의 젊은 남자가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적당한 체격에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뚱뚱하진 않지만 약간 두터운 체형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두 명의 맥락 없는 대화를 오랫동안 엿듣고 있었는데, 십 분 정도가 지나자 비교적 일정하면서 흥미로운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거 알어?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난 부부 중에,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섹스를 하는 부부는 다섯 쌍 중에 두 쌍 밖에 안 된대” 


나는 이 말을 안경 쓴 남자가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남자의 목소리는 누구라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해가 안 되네” 모자 쓴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 조금 이해가 되긴 해. 한 여자랑만 어떻게 계속할 수 있어? 진수성찬도 매일 먹다 보면 질리는 법이잖아”


“사람을 음식과 비유할 건 아니지. 내가 너 같은 놈을 몇 년째 보고 있다고 해서 너한테 질린다고 하진 않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음, 근데, 솔직히 그럴 거면 왜 결혼 같은 걸 하나 싶어. 대부분의 부부가 그렇게 된다는 거면”


“뭐, 예외는 있을 수 있어. 모든 부부가 그렇게 된다는 건 아니잖아”


“절반 이상이 그렇다는 거 아냐. 일 년만 지나도 절반 이상이 서로와의 섹스에 질려버린다고”


“그건 사람마다 달라. 섹스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고”


“뭐라고? 여자는 몰라도 남자는 안 그럴 걸. 섹스 안 좋아한다는 놈 중에 자위 안 하는 놈 못 봤어. 그런 건 다 합리화지”


“너도 결혼할 때쯤 되면 섹스가 싫어질 수도 있어. 전립선염 같은 게 걸려서”


“섹스가 싫어질 수는 없어. 남자는 말이야, 섹스가 질릴 수는 없다고. 그 여자가 질릴지언정 섹스가 질릴 수는 없어. 심지어 전립선염이 걸리더라도. 전립선염이 좆같은 이유는 섹스를 못하기 때문이야. 너도 섹스는 좋아하잖아?”


“음, 확실히 싫어하지는 않아. 말하자면 좋아하는 편이겠고”


“그건 무슨 대답이지? 기회만 있으면 언제라도 할 거잖아?”


“그건 기회에 따라 다르지”


“무슨 기회? 넌 니 이상형이 같이 모텔에 가서,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으면 안 할 것 같냐? 정말 그래?”


“날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다를 것 같은데. 난 외적으로 아무리 이상형이라도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


“그건 그냥 니가 멍청한 거지. 먹어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는데 안 하는 거 아냐? 그건 여자한테도 실례지. 존나 기분 나빠할 걸. 안 좋아하더라도 너랑 한 번 해보고 싶을 순 있잖아”


“난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은 대상이 되고 싶진 않아”


“존나 이상한데”


안경 쓴 남자가 말했다. 두 남자 사이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는 하마터면 잠들 뻔했다. 안경 쓴 남자가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분명 잠들었을 것이다.


“여자가 바람을 피웠는데도 이혼을 안 하는 사람도 있더라니까. 그건 정말 아니지 않냐?”


“그건 그 반대도 많을 것 같은데…… 애가 있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이혼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실상 자녀 쪽이니까” 모자 쓴 남자가 대꾸했다.


“아냐, 내가 알기론 자식도 없는데 그렇다더라니까”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은 거야”


“어디서 들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지. 아무튼 그런 케이스들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쩝”


모자 쓴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 안경 쓴 남자는 목이 뻐근한지 고개를 좌우로 두 어번 기울어 보였다. 뚜둑 하며 뭉친 근육이 풀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될까?” 모자 쓴 남자가 말을 꺼냈다.


“뭘?”


“니 여자 친구가 군대를 기다려줬다고 해서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뭐? 난 그 얘기한 거 아닌데”


“그래? 아님 말고”


“어” 안경 쓴 남자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섹스를 안 한다고 해서 헤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 꼭 이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오래돼서 이젠 섹스도 안 하고, 심지어 여자 쪽은 다른 남자랑 섹스하는데…… 그런 관계를 포기 못하는 남자는 좆 병신이야. 살 가치도 없어. 진심으로”


“그럴 수도 있지, 뭘. 살 가치가 없긴 왜 없어”


“아니, 그럴 수 없지. 말이 되냐? 남자라면 결단을 내려야지”


“누구나 결단은 내려야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니가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냐고”


“말했잖아. 단순하게 생각하라니까”


“난 딱히 내 얘길 하려고 한 게 아니라고”


“그건 알겠어. 그래도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는 있다는 거지”


“어떻게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그냥…… 세상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섹스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든가……”


“……존나 개소리하네……”


안경 쓴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흐려진 대화는 별안간 맑게 개더니 한결 편안한 기분이 됐다. 두 남자는 더 이상의 대화 없이 게임에 열중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패딩을 걸친 뒤 PC방에서 빠져나왔다. 새벽 네 시는 하루 중에서도 가장 추운 시간이었다. 그래도 공기만큼은 상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주황빛 가로등을 세 개쯤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는 아내가 술이 떡이 돼선 화장도 지우지 않은 채 쓰러져 있었다. 내가 몸을 들어 올리는 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난 아내를 소파에 내려놓고는 안방에서 모포를 꺼내와 덮어줬다. 안방으로는 옮기지 않았다. 술에 찌든 아내가 무겁기도 했거니와, 밤늦은 회식의 종착역이 안방 침대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난 거실 바닥에 쿠션을 베고 잠들었던 것 같다. 일어나 보니 아내는 출근한 뒤였고, 아내가 덮고 있던 모포는 내 몸을 덮고 있었다.


<결국은 혼자>,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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