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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백록담 성판악

걷고 걷고 걷기. 백수 이틀 차 (2021년 11월 17일)

by 투오아

태어나 처음 보는, 바람과 햇빛 그리고 바람이 만나야 만들어지는 신비한 얼음 눈꽃. 언 듯 눈이 한쪽 방향으로 쌓인 것 같으나 모두 얼어있는 얼음이다. 눈이 녹지 않고 바람길 모양대로 눈송이채 엉겨 붙어 얼었다.



쾌쾌한 냄새 때문인지 잠을 자다 두 번이나 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오래된 담배냄새다. 아무리 가격이 저렴하다지만 다음부터는 호텔이라고 적힌 곳 보다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아야지 하며 5시 알람에 일어났다.


출발 전 짐을 꾸리고 아침밥을 먹으러 어제 김밥 두 줄 예약해놓은 김밥집으로 향했다. 24시간 하는 식당 덕에 출발 전 순두부 찌개를 먹고 김밥 두 줄을 사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겨 어깨에 매었다. 배낭 안의 갈아입을 옷까지 모두 들어있다 보니 그 무게가 상당하다.

정말 예스런 엘리베이터 층별 안내판

처음 이 호텔이 생겼을 때는 어떠했을까? 예스런 엘리베이터 안 층별안내판을 보며 짧은 생각을 해 본다.


로비로 내려가 택시 요청을 하였더니 새벽 여섯 시임에도 놀랍게도 바로 온다. 관음사 탐방로로 가달라고 요청하고 가면서 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기사님 말씀이 한 사흘 전에 한라산에 눈이 왔고 그 덕에 상고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기사님이 눈꽃과 상고대를 구별 않고 말씀하신 것 같았지만 무슨 대수이랴 그저 멋있을 것만 같아 기대가 되었다.


남한의 최고봉. 해발 1950미터의 백록담을 오르기 위해서는 성판악 탐방로 또는 관음사 탐방로를 사전 예약하고 이용해야 한다. 출발 전날이었던 월요일 저녁 그 사실을 알고는 부랴부랴 예약한 것이 새벽 6시부터 8시 사이의 관음사 탐방로 여정이었다.

관음사에 내려 등산을 시작한다. 예약 QR코드를 보여주고 탐방로 입구에 스캔한 뒤 출발하면 된다. 동이 트기 시작하였지만 어스름 밝은 상태라 노안이 시작된 내 눈으로는 사물이 잘 인식이 되지를 않았다.


화산 지형의 계곡은 뭍의 그것과 무척 느낌이 다르다. 돌이 용암의 흔적이다 보니 돌 자체가 흐르거나 날아온 느낌이 들었다.


가다 보니 위와 같이 큰 굴이 있다. 이름이 구린굴인데 깊이만 400미터가 넘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제주 선조들은 얼음을 보관했었다는 문헌기록이 있다고 쓰여있었다.


좀 더 올라가다 보니 이번에는 숯 가마터가 나온다.

한라산이라는 큰 산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들이 반가웠다.


관음사는 해발 600미터쯤이고 백록담은 해발 1950미터이니 대략 수직으로 1.3킬로미터 정도를 올라가는 것이다. 그에 따라 높이 올라갈수록 길의 상태와 식생이 바뀌게 되는데 그것을 느끼는 것도 신기하였다.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하였다. 해발 1300미터쯤부터는 아이젠 없이 걷기가 어려워져 땅만 보고 걷다가 이곳에서 일차 김밥을 먹었다. 시간이 대략 10시가 되었다. 이곳을 12시까지는 통과해야만 하산이 가능하다는 안내가 붙어있다. 어느샌가 나무들이 키가 많이 줄어들어있다.


계속 걸어가니 현수교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가파른 계단이 계속 나왔고 그렇게 걷다가 갑자기 얼음 눈꽃을 만나게 되었다.

이 얼음꽃이 처음 생기던 날은 바람이 무척 불었나 보다. 내가 오르는 날은 햇볕이 따뜻하여 가벼운 바람막이 잠바 만으로도 충분하였는데 빨간 열매 끝에 바람결대로 얼어붙은 눈꽃들은 쌓이던 날의 추위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드디어 백록담이다.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백록담이다. 그 크기가 쉽게 느껴지지는 않는데 만약 버스를 타고 쉽게 올라왔다면 지금의 느낌을 가지지는 못 했을 것은 확실했다.

북쪽엔 천지 남쪽엔 백록담. 어릴 때부터 알고있는 우리 땅의 경계선이다. 산 정상에 물이 있는 큰 산이 경계를 이룬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었는데 이렇게 곧 쉰이 되는 나이에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참 신비롭다. 사람들이 줄을 백 미터씩 서서 백록담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 그건 포기하고 아무 데나 앉아 두 번째 김밥을 먹었다.


약 네 시간의 산행을 하며 왜 여기에 왔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보았다. 산에서 걷기를 하다 보면 길 외에는 다른 것을 볼 새가 없다.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걷기와 쉬기를 구별해서 가야 하는데 걸을 때는 내 속도에 맞추어 꾸준히 걸어야 한다. 걷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지만 너무 빠르면 끝까지 가지 못한다. 그리고 중간중간 쉴 때는 반드시 내 체력이 회복될 수 있는 상태일 때 쉬어야 한다. 체력은 유리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시 붙기는 하겠지만 일단 깨지면 다시 거기에 채워 넣을 수가 없고 이런 깊은 산에서는 그것은 생명과 직결된다. 원래 가고자 했던 설악산 공룡능선이나 한라산에 오고자 했던 이유가 이렇게 한 가지씩만 집중해야 사고 없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서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흰 눈 쌓인 백록담 앞에서 않아있다 영차하고 힘을 내 일어났다. 올라왔다면 내려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 체력이 남아있길 바라면서 한걸음 내디뎠다.


관음사는 북쪽,성판악은 동쪽이다. 백록담은 이 두개 탐방로에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랑 사뭇 느낌이 다르다. 이미 체력적으로 한계상황이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올라올 때는 느끼지 못했던 주변 식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해발 1200미터 정도 부근으로 기억을 하는데 무릎 정도 키를 가진 식물들이 양탄자처럼 산 전체를 휘감고 있다.

찾아보니 관음죽이라고 하는데 생장 방법이 대나무처럼 땅속줄기로 퍼져나간다고 한다. 말의 방목이 줄면서 최근 제주도에서 너무 많이 퍼지고 있다는 설명에 우리 사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발 700미터쯤부터는 정신이 없을 정도로 힘이 든다. 체력도 문제지만 땅의 돌 들이 계속 발목을 꺾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 데크들은 틈이 넓어 등산스틱의 도움을 받고 싶어도 계속 등산스틱이 틈에 끼이는 바람에 스틱을 쓸 수도 없어 오로지 계속 두발로만 내려와야 하였다.


속밭 대피소에서 한참이나 쉬었다. 가방에 눌린 어깨가 너무 아프고 다리도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아직도 4km나 더 내려가야 했다. 정말 간신히 걸어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걷기 시작한다.

관음죽, 전나무군락지, 나무데크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샌가 관음죽들이 없다. 그 대신 수줍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나무들이 나타났는데 그 모양이 신기하다.

이름이 굴거리나무라고 하는데 잎이 넓적한데도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잎이 떨어졌음에도 계속 초록색인 것이 신기하였다. 설명에 있는 사진에 보면 잎이 힘 있게 펼쳐져 있는 모양인데 겨울에는 열매는 없고 잎이 축 처 진체 겨울을 나는 것으로 보인다. 상록수는 뾰족 잎으로만 알던 나에게 넓은 잎 식물이 이렇게 겨울을 난다는 사실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제 시간도 오후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내 발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중에 저 멀리 성판악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 드디어 끝나는구나. 다행히 해 지기 전에 내려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하지만 그 중간의 힘든 정도는 길을 걸어 봐야만 하는 것이 등산이다. 이제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도전을 시작하는 나에게 나 스스로 다짐을 주고 싶었다. 시작과 끝을 알고 있어도 결국 내 두발로 걸어가 봐야만 알 수 있는 이 길보다 더 어려운 끝을 알 수 없는 새로운 발을 내딛는 나에게 그러므로 더더욱 한 걸음씩 내가 걸어봐야 한다는 다짐 말이다. 두렵지만 그래도 내 페이스에 맞추어 꾸준히 걷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내 인생길을 이렇게 걸어가 보자 다짐하며 이번 여행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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