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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 Jan 19. 2022

한계상황 너머 살자고

우리들의 자원을 잘 활용하는 법 2화 

2016년 봄이었을 거예요. 세부에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출판사에서 일러스트 철학사전의 편집을 의뢰해 작업한 일이 있어요. 묘하게도 내게 필요한 책을 일로 받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아니면 내 스스로 어떻게든 메시지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있겠죠. 

나는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필요한 신의 메시지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유형이 분명해요. 상당히 '살자고'가 있는 타입이라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 책에서 어떤 신의 메시지를 발견했느냐고요? 

철학사를 관통하는 그 일러스트 대백과를 통해,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들에 대한 정리를 할수 있었어요. 내 삶을 철학사가 관통해 나가며 구석구석 정리정돈이 일어났지요. 아, 내가 이런 사유의 기법을 가지고 있구나. 내게 이런 생각들이 있었구나. 이 생각은 이렇게 정리하면 좋겠구나. 

그런 발견은 흥미롭고 즐거운 것이었지요. 아이들 셋이 한국에 돌아와 많은 일을 겪으며 분투하던 때라서 아이들의 모습과 말에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철학사를 관통하는 맥락을 찾으며 몰입해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듯 그 책의 편집을 맡아 일을 하는데, 책의 중반쯤에서 이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한계상황


거다란 몽둥이로 머리통을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치 이 네 음절의 단어를 만나기 위해 이 책의 편집을 맡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요? 나에게는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한 '한계상황'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스퍼스라는 철학자에 의해 언급된 이 '한계상황' 네 음절의 단어를 보고 묘한 위로를 받으며 나는 그대로 펑펑 울어버렸어요. '한계상황'은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꿈과 젊음의 좌절, 질병, 타인으로부터의 거절, 죽음 같은 스스로를 무너져 내리게하는 절대적인 벽을 만났을 때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보통의 인간은 이 한계상황에 이르면 회피하려 하거나 눈을 감아버린다고요. 다른 하나는 한계상황 가운데서도 진지하게 그 과정을 성찰하며 '하나 뿐'인 '한 번 뿐'인 '자기 존재의 자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초월자의 세계로 가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연단'이라고 부르는 말과 유사성이 있습니다. 


내게 바로 그런 한계상황이 있었습니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경험이요. 


수십 억 매출을 하던 기획사의 문을 닫아야 했던 때. 십수 명의 직원을 내보내야 했던 때. 죽으면 받게 된다는 P사의 생명보험료를 떠올리며 유서를 써서 앞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때. 그때가 '한계상황'인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긍정을 장착하고 태어났고 에너지가 넘치며 모든 일에 도전적이었고 대부분 원하는 것을 얻으며 살았던 나에게 실패라고 하면 외고 시험에서 떨어진 일 정도가 다였던 삶. 가난도 내게는 장애나 불행의 요소가 아니었던 나였는데요. 

29살에 시작한 기획사 4년 차에 벌어진 그 위기는 감당이 안 되었습니다. 두어달 거래처에 지불을 받지 못해 억 단위에 빚이 생긴 상황. 독촉 전화들에 시달리고 직원들 급여를 감당하기 위해 밤을 지새워 다른 출판사의 교정을 서너 개씩 보면서 원고 대필로 밤을 지새웠어요. 그래도 고정비가 많다 보니 빚은 줄지 않았고 끝내는 부가세를 제 때 내지 못해, 부가세 채납으로 독촉장과 실형을 살아야 한다는 안내장을 받아야 했지요. 이제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첫째가 있고 둘째가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때였는데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회사 근처 M사가 약속한 수주를 주지 않고 몇 개월에 걸친 나의 사업 아이디어만 가져가 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버렸을 때. 그 일들이 내게 일어날 때, 나는 늘 차를 1차선으로만 몰면서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고 살았어요. 


그러다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쾅!" 8중 추돌사고였어요.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 서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기억은 얼른 첫째를 픽업해서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끝입니다. 온생이 나의 눈앞을 스쳐 간 것도 같습니다. 뿌연 빛깔 속에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간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어떤 새끼야!"를 외치고 다닌 것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눈을 뜬 곳은 을지로의 대형병원이었습니다.


"괜찮아요. 산모도 아기도. 그런데 난소가 기형이네. 그동안 생리 잘 안했죠? 아기 가지기 어려운데. 뱃속에 아기가 신이 준 선물이네요."


몸이 벌벌 떨리는 속에도, 의사의 그 말들이 귀에 쏙 들어와 앉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뱃속에 둘째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무거운 빚 때문에 죽을 생각만 하고 유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며 1차선으로만 운전을 하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생각에 그대로 누워서 꺼억꺼억 울어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영문도 모르고 "산모님, 아기 괜찮다니까. 산모님도 괜찮아요. 안 죽어." 이렇게 위로해 주었지요. 


한계상황이라는 것은 연단이라는 개념과 정말 닮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나의 삶이 바로이 보이기 시작한 뒤로 세상이 아주 달라졌는데요. 아이들이 보이고 남편이 보이고 내가 가진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과정이 계속되었어요. 하지만 단번에 아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나의 삶의 잘못된 점을 까발리듯이 바로 행복해지는 법을 내게 선물처럼 주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그때부터 삶은 오히려 더 지독하게 힘들고 버티기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소중한 남편과 아이들을 생각하지도 않고 죽어버리려고 했던 내가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뒤에야, 뱃속에 아기까지 ㅏ죽일 뻔 했다는 생각이 든 뒤에야 아주 지독한 형벌처럼 마주보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다행이죠? 다시 '살자고'를 위한 이런 스테이지가 있다는 것! 


우리에게 '한계상황'은 선물이라는 생각을 나는 합니다. 이제사요. 지금 어려운 문제 앞에 있다면 생각해 보세요. 이제까지 당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최소한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살아있는 내가 가진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거예요. 모든 게 선물처럼 주어졌다는 것을 새롭게 알아가는 때. 저절로 감사 일기를 쓰게 되어요. 저절로 감사가 넘치죠.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적당히 감사하라'는 말을 듣고 다녔어요. '적당히 미안하라'는 말도요. 하지만 한계상황을 넘어 다시 살자고를 펼칠 때, 내게는 세상의 모든 순간이 고맙고 미안하더라고요.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에게도 그런 한계상황이 있었던가요? 그런 선물을 받으신 분들! 놀라운 사실 알려드릴까요? 보통 이 단계를 지난 사람들은 서로를 쉽게 알아차랍니다. 그 때가 되면 외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친구가 되기 쉽습니다. 아, 정말 다 그대로 선물 같지 않나요? 


오늘은 우리의 자원, 당신이 한번은 부딪혔을지 모르는 한계상황에 대해 나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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