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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Dec 31. 2020

빼앗긴 나의 취향

클래식 음악을 취미로 시작할 때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FM은 나의 클래식 내공의 9할을 만들어 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객기를 부려 배병동 <화성학>을 비롯한 여러 전공서적까지 사 읽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고, 클래식 CD를 몇 백장 사서 듣기도 했으나 돌이켜보면 클래식 FM이 최고의 스승이었던 것 같다.


클래식 FM의 최고 장점은 편식이 불가하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의 취향은 깡그리 무시한 채 흘러나온다는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진정 고역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렇게 꾸역꾸역 듣다 보면 어느덧 조금씩 익숙해지고, 조금 더 듣게 되면 좋은 부분이 들리기 시작했다.

원하던 원치 않던 바로크부터 현대음악까지, 뉴에이지를 거쳐 국악을 돌아 콘서트 실황까지 내 취향과 관계없이 수많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KBS Classic FM


출근길에 갑자기 너무 좋은 선율이라도 들려오면 잊어버릴까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선곡표를 찾아 기록을 해두고 다시 들었고, 장거리 출장길에서 듣던 음악이 너무 좋아 졸음 쉼터에서 모두 다 듣고 다시 길을 달렸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몰랐던 새로운 감동을 접할 수 있었다.




"이게 뭔가요?"

"와... 이건 좀 심하다...!"


자신이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가 가장 많은 사람이 커피를 사는 내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유튜브 계정을 공개할 때였다. 나는 유튜브로 영화 리뷰, 자동차 리뷰, 수학(물리학), 스쿠버다이빙, 클래식 음악만 보기 때문에 내가  구독하는 채널들은 구독자가 100만 명을 넘기기도 힘들었고, 대부분 1만명 남짓했다. (방금 확인해보니 3 Blue 1 Brown이라는 수학 채널이 구독자 334만 명으로 내가 구독하는 채널 중 가장 구독자가 많은 채널이다. 이 채널은 정말 추천한다. 각종 공식이나 정리를 이미지화시키는 능력이 진정 탁월하다.)


3 Blue 1 Brown 유튜브 채널



아무튼 덕분에 나는 압도적으로 마이너 한 채널을 구독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커피까지 얻어먹을 수 있었다. 유튜브의 채널 추천은 진정 놀라울 정도이다. 내가 볼 만한 각종 영상들을 잘 추려서 첫 화면에 나열해준다. 덕분에 유튜브 앱을 실행시키면 보통 영화 리뷰와 클래식 음악 영상이 떠 있고 조금만 밑으로 스크롤하면 자동차와 스쿠버 다이빙 관련 영상이 나온다.


내 취향을 너무나도 잘 알아주는 유튜브 덕분에 예전 클래식 FM을 들을 때처럼 낯설고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영상을 접할 일은 거의 없어졌다. 생소한 영상이 나타나더라도 어느 정도는 나의 관심사와 연관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처음 보는 세상을 접할 일은 없어졌다.


이렇게 나는 내가 몰랐던 새로운 감동을 접할 기회를 스스로 빼앗아 버렸다.




유튜브뿐만 아니라 아마존, 구글, 네이버, 카카오 모두가 내 취향을 누가 더 잘 맞추는지 내기라도 한 듯 덤벼드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어쩌다 우연히 본 영상이나 음악에 홀딱 빠질 수 있는 경험이 거의 불가능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은 사용자를 배려한다는 의도로 나의 취향을 고정시켜버렸고, 어쩌다가 일탈이라도 한 번 하려 하면 수많은 노력이 필요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디지털 세상에서의 일탈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 세상이 와 버렸고, 그렇게 나는 내 취향을 빼앗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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