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comestories Dec 27. 2020

내 인생을 구하러 온, 나의 구원자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지독한 길치에 물건도 잘 잃어버리고, 넘어지기도 잘하며, 할 줄 아는 것만큼이나 모르는 것도 많은 나는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다. 창업하면서는 더 다양한 분야에서 도움을 받게 되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정해진 업무 프로세스가 있고, 과업을 담당하는 부서가 있으니 내가 맡은 역할을 하고, 다른 것은 전문가들에게 넘기면 됐다. 그 세상에서는 나도 전문가 중 한 명이었다. 일의 A부터 Z까지 해야 하는 창업자로서의 나는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할 줄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세상사 어느 것 하나 일이라는 것이 허투루 돌아가는 법은 없으니, 결과물이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여러 곳에서 많은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모르는 영역을 만나게 되고, 그 분야에 전문가 혹은 강점이 있는 사람을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알던 친구, 대학교 선후배 동기, 전 직장 선후배, 지인의 지인까지 갖은 인연은 준비하는 것들이 막힐 때마다 물꼬를 틔워주었고 그 덕에 창업 2년 차를 무사히 지나고 있다. 


빈티지 가게를 하면서 나는 사람을 배운다. 동업자들을 통해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결을 맞춰가며 조율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을 밀도 있게 배운다. 가까운 지인들의 아낌없는 응원과 대가 없이 기꺼워하는 그 순수한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마음을 깊게 쌓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배운다. 회사원으로 살아갈 때는 일과 내가 분리되는 만큼, 관계도 분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창업한 뒤에는 나에게서 회사를 한 꺼풀 벗겨낸 만큼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살갗에 와 닿는 진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아직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감사하다. 이것은 그들에게 띄우는 연서다. 


J는 우리의 모델이다. J는 동생의 친한 친구인데, 가깝게 지낸 지는 6년 정도 되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동생과 친구였던 J는 어릴 때의 기억으로 내가 무섭다고 했다. 동생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자주 오가며 만나게 되어 지금은 제법 까부는 것이 익숙한 사이가 됐다. 바람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린 체구에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이목구비를 가진 J는 외형과는 다르게 담담하고 듬직하다. 가벼운 농도 건네고, 까불대는 것을 좋아하지만 꽤 무거운 중심을 가졌다. 빈티지 가게를 기획할 때 모델 촬영이 꼭 필요한 요소였는데, 고정적으로 모델을 고용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모델 경험이 없는 J에게 모델로 일해줄 수 있는지 부탁을 했고, J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겠다고 했다. J가 모델이 된 지 벌써 일 년 반이 지났다. 일하면서 쉬는 날 하루를 짬을 내서 반나절 꼬박 시간을 써주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 시간을 통해 말로 다 하지 않는 J의 마음을 느낀다. 말로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J의 행동을 통해 투박하지만, 진짜인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행동하는 마음의 소중함을 배운다. J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될 때까지 J를 모델로 할 예정이다. 돈 많이 벌어서, 모델료도 많이 줄게.


Y는 바느질의 화신이다. 꼼꼼하고 차분하면서 너그러운 면이 우리 엄마 같기도 한 Y의 성격은 특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취미 이상의 바느질 실력을 갖췄다. 빈티지 가게는 크고 작은 수선이 필요하다. 모든 수선을 다 수선집에 맡기자면 비용이 한없이 증가할 테니 할 수 있는 것들은 직접 해결하기도 하는데, Y는 기꺼이 그 바느질감을 맡아줬다. 퇴근길이나 쉬는 날 쇼룸에 들러 수선해야 할 것이 있으면 잠깐 새에 깔끔하게 처리해주고, 때로는 내가 집에 바느질감을 들고 가기도 했다. 구멍이 나거나 올이 풀렸을 때는 바느질로 수선이 어렵다. 그런 경우 Y는 자수 실력을 살려 업그레이드해주기도 한다. 복숭아, 데이지, 낙엽, 별 모양 등으로 꾸며진 옷은 흠이었던 것이 매력이 된다. Y도 그렇다. 흠을 매력으로 만들어주는 사람, 귀찮거나 불편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Y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한다. 이렇게 하면 돼지, 괜찮아, 라고 말하는 Y의 말은 귀찮거나 불편한 상황이 순식간에 편하고 괜찮은 순간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군가를 느슨하고 여유 있게 만들어주는 작은 말의 힘, 그것의 작지 않은 영향력을 Y를 통해 배운다. 요새는 동업자 K의 실력이 늘어 Y에게 바느질감을 들이미는 일이 많이 줄었지만, 앞으로도 여러 모양새로 Y를 귀찮게 할 예정이다. 


F는 현지MD이다. 밴쿠버에 사는 내 동생이기도 하다. 반년에 한번은 해외 출장을 통해 물건을 수급하자는 우리의 계획은 코로나 19로 인해 무산됐다. 한국에서도 도매처가 있기는 하지만, 이미 여러 번 다녀온 밴쿠버의 거래처의 좋은 물건들,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아이템들을 받아보고 싶어 F에게 도움을 청했다. 원하는 아이템, 스타일, 가격대를 정리한 내용을 보내주고 괜찮았던 거래처를 알려줬다. 헤어샵에서 일하는 F는 휴일 중 하루를 반납하고 두 달 정도를 발품 팔아 물건을 구해줬다. 종일 바잉을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것을 정리해서 물건을 보내주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동생이지만 몇 달에 거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기에 감사하다. 동생은 언제까지 동생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부터 그의 친구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면서 동생과도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냉정한 면이 많은 나와는 달리 밝은 에너지에 사랑이 넘치는 F를 동생이자 친구로 만날 수 있어 참 행운이다. 


K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반갑지 않았다. 신입사원 동기였던 K와 나는 신입사원들이 으레 하는 장기자랑 행사의 참가자와 진행팀으로 만났다. 같은 신입사원이면서 준비팀이라고 이것저것 요청하는 나를 좋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 자명했다. 그 이후 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 한 달 넘게 매일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K는 회사 스케쥴 때문에 남자친구에게 차였다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브레이크 없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아직 이런 얘기를 나눌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는 몹시 당황했지만, 그 뒤로 우리는 8년 정도 일을 같이했고 지금은 동업자가 되었다. K는 섬세하고 배려심이 많다. 본인은 눈치를 많이 보고, 잘 쪼는 성격이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감정 기제가 무엇이든 섬세한 배려로 표현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 귀한 자질은 나의 모난 점을 잘 감싸주고,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곳을 비춰볼 수 있게 해준다. K와 함께한 시간 동안 나는 느리고 더디게 K의 결을 배운다. 누군가 내가 예전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면, K의 영향이 꽤 크리라는 것을 장담한다. 장단점이 확연히 다른 우리의 다름을 나는 사랑한다. 


한 사람이 온 우주만큼 귀한 존재다.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만큼 내 세계가 확장되어 나의 지경이 넓어지는 멋진 일이다.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만나 이 근사한 경험을 하는 행운은 일 년에 몇백 억 원을 다루던 회사원 시절보다 일 년에 몇천만 원을 다루는 지금 더 자주 찾아온다. 나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래서 원하는 일들을 해낼 수 있다.


나의 우주들과.


이전 14화 #Pay for the earth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