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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Sep 13. 2020

그늘을 돌아나오며


올해가 절반 즈음 지났다. 7월 중순이 지났으며, 이번주가 올해의 서른번째주라니, 대충 짚어봐도 올해의 한 중간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한 해의 절반동안을 매일 매일 다른 미래와 설레임, 그리고 불안을 주고 받으면 살았다.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생각과 그림이 바뀌어졌다. 꽤 시간을 두고 준비했던 일이 예상과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계획을 수정해야 할지 없었던 일로 해야할지 갈림길에 서있었다.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내 안에서 내 스스로가 강하게 나를 지탱하지 못했음은 여러번 생각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 안에서 내가 좀 살뜰하게 나를 돌봐야 했는데, 나말고 나보다 더 흔들리는 사람을 잡아주느라 나를 모른척 했다. 그저 어쩌지 못하고 흐르는 시간에 나를 던져버렸다. 마음은 불안해서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가슴이 두근거리는 날이 많았다. 손에 뭐 하나 잡히지 않아서 집안일도 먹는일도 아이들 일도 그저 최소한만 꾸리면서 지냈는데, 거짓말처럼 책은 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주방에도 거실에도 내 방에도 어디 가도 읽는 거리에라도 내 마음을 의탁할수 있도록 여러 군데에 여러권을 책을 두고 동시에 함께 읽거나 또는 넘겨가며 지냈다.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티셔츠 하나 운동화 하나도 내 물건을 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사고 싶은 욕구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새삼스레 놀라운 사실이었다. 아마존 계정에 최근 구입목록을 봐도 그때 그때 사야했던 아이들 물건이나 생활용품 뿐이었다. 그나마 떨어진지 2주정도 지나서 스킨과 수분크림을 하나씩 산게 전부였다. 무언가를 산다는데 내가 이토록 무덤덤했는지 알지 못했다. 늘 무언가를 자주 많이 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계절이 바뀌면 갖고 싶은 신발 한 켤레, 갖고 싶은 옷 한벌이 있었던것 같은데, 겨울에서 봄이 오고, 봄에서 여름이 오는 동안, 나는 늘상 입던 옷을 습관처럼 꺼내 입고, 늘 상 신던 시발을 꺼내 신으면서도 나에게 무슨 변화가 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식욕 또한 전혀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니 매끼 무언가를 차려서 먹어야 했지만, 그냥 정오가 되었으니 점심을 먹고, 저녁 6시쯤 되었으니 식사를 준비해 먹었을 뿐이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생각도 의욕도 없었고 계획도 딱히 없었다. 그저 식사시간 30분전 쯤에 냉장고 문을 열고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처럼 손에 잡히는 몇가지 식재료를 꺼내어 점심을, 혹은 저녁을 해결했다. 무엇을 해먹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밥도 해먹고 찌개도 끓였던것 같고, 파스타도 해먹고 돈까스를 먹은 날도 있었던것 같다. 아이들 밥을 한끼도 대충 거른적도 없다. 하지만 뭐가 먹고 싶어서 무언가를 해먹은적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올해 내내 집에 사람을 제대로 초대한 적도 없는것 같다. 


하루는, 시간을 넘기고 좀 느즈막히 점심을 먹기도 했고 그다지 허기를 느끼지도 못하겠기에, 저녁을 거른 일이 있었다. 밥도 아이들 먹을 만큼만 남아 있었는데, 그렇다고 새로 밥을 할만큼 식욕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녁을 걸렀는데, 놀랍게도 밤늦게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살면서 식사를 거른적이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몇번 되지 않았지만, 그랬을 때마다 너무 허기지도 힘이 빠졌던것 같은데, 이렇게 식사를 거르는 일도 나에게 어떤 자극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아이들이 있어서 하기 싫은 밥을,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또 뭘 해먹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언가를 해내야 했지만, 아이들마저 없었다면 아마 아무렇지도 않게 한끼를, 두끼를, 하루를 어떤 음식도 먹지 않고 지내는 것이 별일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겁이 나기도 했다. 날씨마저 덥고 습하고 어둡고, 비가 오다가 하늘이 개이다가 내 마음처럼 뒤죽박죽인채로 며칠인지 몇주인지 모르게 지나왔더니, 이제 여기 올해의 한중간 쯤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밤새 내렸던 비가 그치고 맑게 갠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는데, 꽃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바람도 느껴진다. 밤새 비를 맞아서 물이 찰랑찰랑 가득차 있는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고무 슬리퍼도 이제야 보인다. 물을 준 기억이 없으니 오랫동안 물을 못먹었을텐데 비가 온 탓에 생기를 찾은 화분도 이제야 보인다. 그리고 그제서야 허기도 느꼈다. 시원한 보리차를 한잔 마시고, 아침준비를 시작했다. 간단한 아침밥상이지만, 뭘 하나 더 올려주면 아이들이 좋아할까란 생각도 했고, 바삭하게 구워진 빵을 보면서 버터를 조금 발라 소리를 내며 베어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이렇게 긴 그늘이 지나가는 걸까. 그리고 얼마간 난 밥을 먹고 싶어 먹다가, 또 먹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날이 오게 될까.




덧.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던 작년 여름에 썼던 초고를 고쳐 올려봅니다. 올해는 팬데믹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있었어서 그런지, 조금은 공감가지 않는 내용과 분위기가 있네요. 

#13th

#conceptzine_100days

Photo by João Marcelo Martin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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