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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창 Apr 16. 2020

청년기업가 에디슨-10화

에디슨은 사고를 친 이후 이후 떠돌이 전신기사로서 방랑생활을 합니다.

9화. 겁없는 아이( https://brunch.co.kr/@ipnomics/9)에서 이어집니다.


기회의 창 


    에디슨이 살던 당시 철도와 전신 산업은 서로 얽히면서 같이 발전하고 있었다. 철도산업은 기차의 정확한 운행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전신 사무소를 설치해야만 했다. 한편 전신 산업은 전국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전신주 가설을 위한 토지가 필요했다. 철도 기업은 전신기업이 전신 선로를 철로 옆에 부설하는 것을 허용해 주고 대신에 전신기업은 전신 사무소를 기차역 안에 두었다. 이로 인해 두 산업은 비용을 절감하면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에디슨의 10대 시절인 1860년대는 동부와 서부를 잇는 대륙횡단철도 건설과 전신가설이 본격화되면서 미국 전역이 철도와 전신으로 촘촘히 연결되고 있었다.    


떠돌이 전신기사      


     에디슨이 전신기사로서 일할 곳은 많았다. 캐나다에서 도망친 이후 에디슨이 향한 곳은 미국 중북부지역에 있는 미시간(Michigan)의 아드리안(Adrian)이었다. 그는 그곳에서도 기차역의 야간 전신기사 일자리를 잡았고 월급은 75달러였다. 에디슨은 아드리안에서 조그마한 작업장(workshop)을 차릴 때까지 머물렀다. 그러나 어느 날 긴급 메시지를 처리하기 위하여 감독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전신기를 사용하였다. 결과는 해고였다. 그가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인디애나(Indiaa)의 포트 웨인(Fort Wayne)이었다. 그곳의 일자리는 주간 전신 업무 처리였다. 그는 주간 일자리를 선호하지 않았고 2달 후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를 향해 떠났다. 그곳에 도착한 것은 1864년 가을이었고 에디슨은 웨스턴 유니온(Western Union, WU)에서  ‘2등 전신기사’가 되었다. WU는  철도를 따라 역에 전신 사무소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기업은 미국 전신 산업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클 뿐만 아니라 최초의 자연 독점 기업 중 하나가 된다. 에디슨은 훗날 자신의 특허발명을 이 기업에 매각하면서 성공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기업과 에디슨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므로 이 기업의 이름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에디슨은 1864년과 1868년 사이에 내셔빌(Nashville)에서 3개월, 멤피스에서 3개월, 루이즈빌(Louisville) 에서 4개월 등 이런 식으로 미국 중서부 지역을 떠돌아다녔고 때로는 한번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다.


떠돌이 기사의 방탕한 삶


 남북전쟁(1861-1865) 이후 전신기사는 대체로 어렸다. 이들은 회사에 취직하지 않고 전신 사무소를 찾아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떠돌이 전신기사는 걱정이 없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 이들의 작업장은 비좁고 더러웠으며 어수선했다. 이들은 허름한 하숙집에서 술을 마시고 음란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씹는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다. 에디슨 역시 이러한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술에는 매우 약해서 술자리만은 견디기 힘들었다. 신시내티에 만난 에디슨의 친구인 아담스(Milton F. Adams)는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에디슨은 일자리를 찾아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는 열여덟 살이었고 옷은 남루하고 말투는 거칠고 투박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골 촌뜨기였다. 깡말라 있었고 소년들은 그를 따스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그는 외로웠다.     

최고를 향한 사닥다리


     전신기사에도 나름대로 서열이 있었다. 이들 기사는 사무직원보다 지위가 높았고 기차역의 본선(Main line) 역에 일하는 기사가 지선(Branch Line)의 기사보다 대우가 좋았다. 조작이 빠른 기사가 느린 기사보다 서열이 높았으며 특히, 언론 관련 기사는 최상위로 인정을 받았다. 에디슨은 언론 기사를 취급하는 최고의 전신기사가 되기를 원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링컨 암살 사건(1865년 4월 14일)이 일어나면서 뉴스가 넘쳐 나고 있었다. 에디슨은 언론 전신을 담당하는 야간 당직 동료들에게 몇 시간 동안 자신이 당직일을 해주겠다고 했다. 야간 당직 전신기사들은 한번 자리를 비워주면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에디슨은 밤새 뉴스 전신을 처리했다. 에디슨은 이렇게 하면서  하나씩 둘씩 사다리를 타고 최고의 전신기사로 올라가고 있었다.    



 참고.

4차 산업혁명시대 에디슨 다시보기.(ttps://brunch.co.kr/@ipnomics/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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